뉴질랜드에서의 첫날, 지상낙원에도 시궁창은 있다

에어비앤비 방탈출 사건 2

by 윤슬

호주 다음 여행지는 뉴질랜드 오클랜드로 정했다.

오클랜드행 항공권을 예약하고 나서부터 마음이 들떴다.

뉴질랜드라니!


'뉴질랜드'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는가.

나는 있다. 대자연, 반지의 제왕 촬영지, 깨끗한 공기, 신선한 버터와 우유. 푸른 들판과 숲, 끝없이 펼쳐진 녹색이 ‘New Zealand’라는 글자 뒤에 배경처럼 깔린다.

그리고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던 어릴 적 친구 생각도 난다. 대학생이 되어 친구를 다시 만났을 때, 친구 아버지께서 뉴질랜드에서 낙농업으로 큰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살면서 보고 들은 뉴질랜드는 죄다 좋은 이야기뿐이었다.

그러다보니 내게 뉴질랜드는 나라라기보단, 지상낙원에 가까운 곳이었다.


이번 숙소는 남편대신 내가 정하기로 하였다. 에어비앤비 숙소를 둘러보다 눈에 띄는 집을 발견했다. 신규 숙소 표시가 붙은 곳인데, 사진 속 집은 신축처럼 말끔해 보였다. 신규 숙소라더니 한 달 새 게스트가 세 명이나 다녀갔나 보다. 그들은 모두 별 다섯 개와 함께 극찬을 남겨두었다. 시내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비슷한 크기의 다른 집보다 10% 정도 저렴한 가격이었다.


'괜찮은 위치의 새 집인데, 신규라서 저렴한가 봐!'


운 좋게 좋은 집을 찾았다고 확신하며, 예약부터 결제까지 망설임 없이 진행했다.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는데, 그것은 사진 속 호스트의 인상이었다. 그녀는 우리 이웃나라 사람으로, 뉴질랜드 이민자인 모양이었다. 사진 속 아주머니는 화장이 과하게 진했고, 눈매가 날카로웠다. 묘하게 싸한 느낌이 들었지만, 숙소의 장점들이 그 감각을 눌러버렸다.

아무렴 어떠랴. 집만 좋으면 되지.


오클랜드에서 첫 열흘을 보낼 보금자리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가 다 되어서였다.
건물이 생각보다 낡아 보였는데, 어두워서 그런 거라고, 내부는 사진처럼 리모델링되어 있을 거라며 스스로를 달랬다. 20kg짜리 캐리어를 들고 3층 높이의 계단을 헉헉대며 올랐다. 숨을 고르며 문을 열었는데, 이럴 수가!

처음엔 호스트가 집을 잘못 안내한 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사진 속 그 집이 맞긴 맞다. 다만 사진이 20년쯤 전에 찍힌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눈앞의 집은 낡고 후지고 지저분했다.

하아, 당했다.


브리즈번에서 오클랜드까지 비행시간은 짧아도, 짐을 끌고 밤에 낯선 도시에서 숙소를 찾아오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당장 씻고 눕고 싶은 마음뿐인데, 그러려면 최소한의 청소가 필요했다.

짐가방에서 물티슈와 테이프 클리너를 꺼냈다. 선반과 식탁의 먼지를 닦고, 식탁의자와 소파에 붙은 동물의 털을 떼어냈다. 빨간 물 곰팡이와 푸른 스틸 곰팡이가 울긋푸릇 피어난 화장실을 청소하고, 샤워실 문틈에 죽어있는 커다란 벌레는 휴지에 싸 버렸다.

한 시간쯤 청소를 하던 중, 세탁기를 열어본 남편이 나를 불렀다. 그 안을 본 순간, 우리는 여기서 절대 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세탁기 내부 묘사는 독자 비위를 고려하여 생략합니다-


맥이 풀렸다. 기대에 차서 온 뉴질랜드인데 도착하자마자 이런 일을 겪다니.


여행 중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 5월, 해외 한 달 살이를 시작하던 날, 달랏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그땐 우리가 미숙했고, 그곳은 베트남 달랏이었으니까 생각하고 넘겼다.

하지만 오클랜드에서 다시 겪으니 충격이 컸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기분이랄까.


뉴질랜드. 청정국가. 깨끗한 나라.
다른 뜻인 줄 알면서도,깨끗한’은 자연스럽게 깔끔한’, '청결한', ‘위생적인’과 같은 단어로 머릿속에서 이어졌다.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더니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선진국, 잘 사는 나라,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
그곳에 설마 사진으로 사기 치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선입견도 없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 숙소에 달린 세 개의 리뷰는 대체 뭐였을까. 그중엔 ‘깨끗하다’는 평도 있었는데, 이 집을 보고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리뷰를 남긴 세 명 모두 젊은 사람들이었는데, 처음 우리를 맞이했던 호스트의 아들이라던 청년과 비슷한 또래였던 것 같다.

싸한 느낌의 호스트 사진이 떠오르며, 사진 속 집과 내가 서있는 실제 공간 사이엔 시간이 아니라 의도가 흘렀다는 의심이 들었다. 합리적 의심이 꼬리를 물자, 실망과 우울은 분노로 바뀌었다.


지상낙원에도 시궁창은 있다.
깨끗한 나라니까, 잘 사는 나라니까, 그리고 호주에서의 숙소 만족도가 워낙 높았으니까 뉴질랜드도 당연히 그럴 거라 선입견을 가졌던 내가 어리석었다.

나는 국민성이라는 말을 잘 믿지 않고, 특정 국가나 국민에 대한 편견도 없는 편이다. 그런데 6개월 간 여행 중 겪었던 일에 이번 사건이 얹히자 하나의 생각이 자리 잡았다. 앞으로 집을 구할 땐 호스트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에어비앤비의 ‘호스트 사용 가능 언어’에서 00어가 제일 먼저 보이면 피하기로 다짐했다. 아무리 리뷰가 좋을지라도.

뉴질랜드 여행 첫날, 선입견 하나가 깨지고 편견 하나가 생긴 날이었다.


+ 호스트에게 사진을 보내고 퇴실 의사를 밝혔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다음 날 체크아웃하며, 에어비앤비 측에 사진과 함께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에어비앤비에서 조사를 진행한 뒤 문제를 확인한 듯합니다. 예약금 전액 환불과 추가 지원금, 다른 숙소를 구한 비용 일부까지 보상받으며 사건은 잘 마무리되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