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기구한 인연
일본에 와서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제일 처음으로 만난 상사, H상.
제 독자분이시라면 여태까지 몇 번 언급이 있었으니 기억하고 계실 거다.
네, 바로 그 H상한테서 이직 제안을 받았습니다.
사정은 이러하다.
도저히 못하겠다고 한국으로 간 사건이 있었지만 결국 나는 회사로 돌아갔고, H상과 나는 울며 서로에게 사과했다.
그 뒤 데면데면한 관계가 이어졌고 몇 달 뒤 H상은 퇴사했다. 나는 1년 좀 더 있다가 지금 회사로 이직했다.
H상은 퇴사 후 지인인 S상의 벤처기업에 들어갔고 그 곳에서 현재 임원직을 맡고 있다. 신세 진 상사이기에 나는 간간히 안부 연락을 했고 일 년에 한 번 정도의 주기로 밥도 두어 번 같이 먹었다.
그러다 저번 주 갑자기 오사카로 출장이 잡혔으니 만날 수 없냐고 연락이 왔다.
지금의 벤처기업 사장인 S상과 같이 출장을 올 예정이니 같이 보자고 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으로 이건 단순한 친목 다지기 만남이 아닐 거 같다는 예감이 들었지만, 당일이 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약속 당일, 나는 꽤 긴장했지만 일단 만나서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S상이 예약해둔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안부를 주고받은 뒤 이번 출장 기간과 다음 예정 시간을 물었다.
H상과 S상이 순간 눈빛을 교환하고는 둘 다 묵묵부답이다.
몇 초간의 침묵 후 H상이 입을 연다. "사실 오늘 푸딩 씨 만나러 여기까지 왔어."
헉. 역시!
약속이 잡힌 뒤부터 계속 이상하게 긴장되고 신경 쓰이더라니 내 감이 맞았던 건가.
그리고 너무 미안해졌다. 둘이 사는 곳은 도쿄보다 먼 곳으로 신칸센으로 5시간은 걸리는 곳. 나 보러 왕복 10시간 걸려서 온건가.
구체적인 제안은 꽤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현재 S상이 운영하는 벤처기업에서, 인재 소개 쪽으로 새로운 사업을 진행하려는데 나만한 적임자가 없다는 거다. 내가 만약 수락하고 온다면 '부문 책임자’ 직위를 줄 것이고 급여는 지금 회사보다 25% 상승한다. 인센티브는 별도. 내가 열심히 하는 만큼 보상받을 거고 직위가 있으니 업무 자유도도 높을 것이다.
외국 출장도 자주 있을 거고 코로나 상관없이 100% 재택근무라고 한다. 극단적인 발상으로 한국에서도 일할 수 있는 거다.
입사 시기는 특별히 제약이 없지만 1년 안에, 나한테 적절한 타이밍에 입사해주면 고맙겠다고 한다.
그 날 아주 비싼 고기를 얻어먹었는데, 먹는 순간 고기가 입안에서 녹는 감칠맛을 경험하고도 나는 그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없었다. 얘기 듣는 내내 고민스러워서 고기를 코로 먹는 건지 입으로 먹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아직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있고, 고민스러운 사안이었기에 많이 생각해보고 천천히 답을 달라는 한 마디와 함께 헤어졌다.
지금 회사가 충분히 만족스러웠기에 이직은 아직 생각해본 적 없다. 하지만 이런 기회가 또 올까 알 수 없다는 불확실함이나 반면 내가 다시 H상과 일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함 등 여러 감정들이 교차한다.
잘 모르겠다. 혼란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