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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카 Oct 03. 2020

토요일 4시 반, 슈퍼를 가는 이유

제네바에 온 후, 토요일은 나에게 쇼핑의 날이다. 


지금은 1주일에 절반 정도는 재택근무를 하고 있어서 그나마 좀 낫지만, 이전에는 주중에 7시까지 여는 슈퍼에 퇴근하고 가는 게 쉽지가 않았다. (아. 목요일은 예외로 보통 9시까지 연다) 동료들 중에는 그래서 점심시간에 장을 보러 가는 사람들도 종종 있는데, 회사에서 집까지 걸어 다니는 나의 경우에는 장을 본 후에 짐을 이고 지고 가는 게 힘들어서 그러지 못한다. 

친한 친구는 1주일마다 온라인으로 주문하고 배달을 시키는데, 이 경우 배달료만 만원이 넘게 나오기 때문에 혼자 사는 내가 그 배달료를 부담하기에는 돈이 좀 아깝고 시킬 것도 많이 없다. 일요일은 거의 모든 가게가 휴무이다. 그래서 토요일은 1주일 중 유일하게 느긋하게 여기저기 물건을 보고 사러 다닐 수 있는 날이다. 


이 동네에선 모든 걸 한 슈퍼에서 한꺼번에 사는 게 참 힘들다. 그래서 나는 알디 (독일계 체인이고 좀 더 저렴하다)에서 채소와 과일을 사고, 미그로에서 요거트, 빵, 커피와 차, 주방용품 등등을 사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쿱에서 계란이나 과일, 세제, 생선, 즉석식품 그리고 급하게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한다. 이렇게 슈퍼 순례를 하다 보면 사는 건 몇 개 없지만 두세 시간은 훌쩍 간다.


처음에 와서는 훨씬 저렴한 프랑스에 토요일마다 원정 쇼핑을 갔었다. 하지만, 혼자 사는 살림이라 따져보니 크게 차이가 없었고- 프랑스는 고기와 술이 훨씬 저렴한 데 둘 다 내가 거의 사지 않는 품목이라 더 그렇다- 오히려 싼 맛에 불필요한 물건들을 사게 되고,  버리게 되는 물건도 많아졌다. 또 아무리 트램이나 버스 타고 닿을 수 있는 프랑스이지만, 동네에서 쇼핑하는 것보다는 시간이 걸리고 번거롭고 피곤하기도 했다. 그리고, 스위스에 살고 있으니 지역경제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기특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사는 이 집으로 온 후에는 프랑스 원정쇼핑을 끊었다. 



나는 토요일 오전에 일찍 일어나서 슈퍼가 사람들로 북적이기 전에 위의 3군데 슈퍼를 순례하면서 1주일 동안 필요한 장을 본다. 그리고 토요일 오후에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꼭 내가 하는 일은 오후 4시 반 정도에 집 근처의 쿱에 가는 것이다. 이미 장은 다 보았고, 이 때는 가서 반 값 할인 식품을 두리번거리면서 찾아본다. 


어떻게 4시 반에 슈퍼에 가는 게 내 일과가 되었을까? 제네바에 온 지 얼마 안 된 어느 토요일 오후에 나는 쿱 슈퍼에서 작은 초콜릿 케이크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장 바구니에 넣으려고 하는데, 매대 근처에 계속 서 계시던 할머니가 나에게 말씀하신다.

" 지금 사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봐요. 일단 케이크를 들고 있어 봐." 

그러고 보니 할머니는 이미 다른 케이크 2종류를 손에 들고 계셨다. 할머니 하시는 말씀이, 이 케이크 유통기한이 오늘까지라 조금만 기다리면 직원들이 와서 반값 스티커를 붙일 거라고 한다. 그래서 미리 물건을 확보해 놓고, 직원이 오면 내가 살 물건에 스티커를 붙여달라고 하면 된단다. 그제야 나도 내가 집었던 케이크의 유통기한이 오늘 까지라는 것도, 케이크 매대 근처에서 서성대는 사람들이 몇몇 있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할머니 말씀대로 조금 있으니 직원이 나타나서 반값 스티커를 붙이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익숙하신 듯, 손에 들려있던 케이크를 직원에게 내밀고, 직원 역시 익숙한 듯 날짜를 확인하고 스티커를 붙여 주었다. 할머니께서는 내게도 얼른 케이크에 스티커를 받으라고 눈치를 주셨다. 순식간에 꽤 많은 사람들이 나타나서 이 일을 반복했고, 토요일 늦은 오후 케이크 매대는 절반은 비게 되었다.


지난 토요일 내가 산 반값 식품이다 (연어 타르트, 바미 세리 밤맛 케이크, 사과 케이크) 

이 날을 시작으로 토요일 오후에 슈퍼를 가게 되면서, 4시 반 정도가 반값 스티커가 붙기 시작하는 시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또 케이크뿐만 아니라, 초밥이나 샐러드, 연어, 피자 등등 다른 신선식품들도 비슷한 시간에 스티커를 붙인다는 것도 말이다. 매일 오후에 반값 스티커를 붙이지만, 일요일이 휴무여서  토요일에 물건이 제일 많이 나온다.  


물론 큰돈을 아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싼 맛에 필요 없는 것을 사기도 한다. 하지만, 반값 스티커에 붙여져 있는 문구처럼 " valoriser au lieu de jeter-버리는 대신에 재활용(혹은 가치를 더하는)"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 생각지도 못한 득템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밥도 하기 귀찮고, 베이킹은 더 귀찮은 주말에 소소한 먹는 기쁨을 주는 나에게는 작은 이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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