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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모 Jul 30. 2019

철학책을 읽을 때
'올바른 해석'이 있을 수 있을까?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환희의 송가)은 매우 독특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노래이다. 베토벤이 청각을 잃어가고 있던 상황에서 작곡되었다는 점 외에도, 어떤 상황에서 이 노래가 연주됐는지를 살펴보다 보면, 이 노래가 얼마나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지에 놀라게 된다.

  우선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은 나치 정권 당시 여러 행사에서 자주 연주되곤 했다. 이 노래는 국민들로 하여금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게 하고,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만드는 데에 활용됐다. 그러나 이 노래는 나치와 같은 극우 진영에서만 사랑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은 정치적으로 나치와 정반대 극단에 있던 소비에트 연합에서도 자주 연주되었다. 소비에트 연합은 이 노래를 '공산주의적 정신을 잘 표현하는 노래'로 해석하였고, 이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삶의 보람과 행복을 표현하는 데에 이 노래가 자주 활용되었다.

  정치적으로 좌우 극단에 놓여있는 사람들만이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독일이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어있던 당시, 독일은 동서 단일팀을 만들어서 올림픽에 출전을 했는데, 이때 동서 단일팀이 국가(國歌) 대신 사용했던 곡이 바로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이었다. 이때의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은 좌우 극단의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어 평화를 상징하는 노래로 사용됐다.

  그렇다면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이라는 노래는 어떻게 해석해야 올바른 해석이 되는 것일까? 나치의 해석처럼 그것은 극우적인 노래인가? 아니면 소련의 해석처럼 극좌적인 노래인가? 아니면 독일 단일팀의 해석처럼 평화의 노래인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전혀 다른 성격의 노래인 것인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


  <맹자>는 매우 독특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텍스트이다. 수천 년 전에 써진 텍스트라는 점 외에도, 이 텍스트에 대한 해석이 후대에 얼마나 많이 변화해왔는지를 살펴보다 보면, 이 텍스트가 얼마나 다양하게 해석이 될 수 있는지에 놀라게 된다.

  맹자가 활동했던 기원전 300년경, 맹자는 자신의 이론을 받아들여줄 제후를 찾으러 여러 제후국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를 채용해주는 제후는 아무도 없었으며, 결국 맹자 생전에 그의 사상이 가졌던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못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맹자> 텍스트가 가지는 영향력은 변화해갔다. 송대 유학자 주희가 <맹자>를 <논어>, <대학>, <중용>과 함께 사서(四書)로 묶으면서 <맹자> 텍스트의 지위는 경전으로 격상되었으며, 원나라(元)에 이르러서는 <맹자> 텍스트가 과거시험 기본 교재로 활용되며 벼슬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읽어야 할 책이 되었다.

  그러나 <맹자>의 지위가 항상 높은 상태로 유지됐던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 문화 대혁명 당시, 유교적 문화는 중국 공산당에 의해 정면으로 비판을 받게 됐다. 홍위병에 의해 공자를 모신 사당은 무너져 내렸고 전통적 도덕은 해체되었으며, <맹자> 텍스트의 위상 역시 바닥으로 추락하게 됐다.

  그렇다면 <맹자>라는 텍스트는 어떻게 해석해야 올바른 해석이 되는 것일까? 기원전 300년경에 살았던 제후들이 이해했던 것처럼, <맹자>에는 별로 쓸 만한 내용이 없는 텍스트라고 해석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송대 유학자가 이해했던 것처럼, <맹자>는 존숭해 마지않아야 할 경전과도 같은 텍스트인 것인가? 아니면 문화 대혁명의 홍위병이 이해했던 것처럼, <맹자>는 문화 발전을 저해하는 불순한 사상을 담고 있는 텍스트인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전혀 다른 성격의 텍스트인 것인가?


<맹자집주>


  '철학 텍스트를 해석한다'라는 말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아마 그것은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을 해석한다'라는 말만큼이나 모호한 말인 듯하다. 어떤 사람은,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베토벤이 그 노래를 작곡할 당시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었는지 정확히 파악해내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은, 노래의 선율과 연주에 사용되는 악기를 정확히 알아야 그 노래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사람은 노래의 창작자가 누구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노래를 감상하는 관객이 느끼는 감정이 전부라고 한다. 이처럼 베토벤 교향곡 9번을 해석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하지만 이들이 제시하는 방법들 모두,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을 해석하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철학 텍스트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맹자>를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맹자가 살던 춘추전국시대의 상황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은, <맹자>에 적힌 한문과 문학적 표현을 정확히 파악해내야 그 텍스트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은, 맹자의 의도가 어찌 됐건 상관없이 <맹자>를 읽는 독자가 이해한 해석이 모두 올바른 해석이라고 한다. 이처럼 <맹자>를 해석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하지만 이들이 제시하는 방법들 역시, <맹자>를 해석하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 텍스트 해석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없으니, 이 해석도 옳고, 저 해석도 옳고, 모든 해석이 다 옳은 것일까?

  만약 누군가가 <맹자>를 읽고 “<맹자>는 4차 산업혁명을 넘어서 5차 산업혁명까지 내다본 혜안이 담겨있는 위대한 책이다! 대단해!”라는 말을 한다면, 우리는 분명 그 해석이 잘못됐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 텍스트 해석에 대한 기준이 명확히 서지 않은 상황에서는, 이와 같은 허무맹랑해 보이는 해석에도 명확히 반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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