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RM WATER UNDER A RED BRIDGE, Shohei Imamura 2001]
물은 불보다 더 무섭다. 화마(火魔)는 재라도 남기지만 수마(水魔)는 흔적도 지운다고 했던 옛말이 틀리지 않았다. 꼬맹이가 인도에 있어선지 남의 일 같지 않은 격변의 지진과 해일의 사태. 2004년 한 해의 마무리가 불행이라니, 천재지변이라 탓할 곳도 없겠지만 아픔의 물을 먹고 살아남은 사람 모두 절망에만 눌려있지 않기를, 흙탕물이 몸을 통해 빠져나올 때쯤 편히 살아왔던 나태한 사람들을 일구는 정화의 물로 바꿔지기를 바란다. 그래도 평상의 죽음이 이토록 순식간에 터져 나온 것은 서글픈 일임엔 틀림없다. 아비규환의 현장. 구호의 손길을 원한다고 하던데 갈 수가 없어 조금 다른 이야기로 마음을 전한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우나기 うなぎ>가 한참 화제가 되었을 때조차 쳐다보지 않았던 일본 영화들. 취향과 엇나간 박스들을 향해 일순간 고정된 편견을 버리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래도 헛웃음을 치는 황당무계한 스토리에서 뿜어진 일말의 따스함이 마음을 적실 때 빗긴 눈매는 제자리를 향한다. 그런 영화가 바로 <붉은 다리 아래 흐르는 따뜻한 물>이다.
마른 속을 자주 긁다 보니 목마른 것을 알게 됐다. 물을 많이 마시다 보니 다리 젖는 것도 알게 됐다.
평소의 나는 좀처럼 아프단 말을 꺼내지 않는데 나를 적으면서 자주 아프다고 말하는 나를 발견했다. 주술처럼 아프다는 말을 반복하다가 어느 고장 물을 마시고 이타이이타이병(イタイイタイ病)에 걸린 걸까 의심이 됐다. 한 때 일본 열도를 뒤덮은 카드뮴. 물길을 따라 염병을 돌리며 사람들이 내지른 아픔을 먹이 삼았다. 외진 마을에는 가슴을 뚫어볼 기계가 없으니 신기 어린 굿판을 벌인다. 무당의 주문에 지문이 닳도록 비는 사람들. 어이된 일인지 아픔은 여전하다. 송곳으로 변해버린 통증의 시선은 사람들을 광적인 상태로 몰아가며 엉뚱한 화살을 꽂는다. 치유되지 않는 고통과 해명되지 않은 원인에 한 순간 거대한 공포로 변해버린 집단의 광기. 그들을 대변하던 사람을 제물로 던져버리고 그의 딸까지 물에 빠뜨린다. 오염된 물을 한가득 마신 두 길의 운명을 따라 늙은이는 물에 잠겨 죽고 아이는 그 물로 가득 찬 채 살아남는다. 그렇게 하늘은 말없이 말을 전한다. 천상의 보물을 평범한 인간의 몸속에다 품어놓는다.
저주를 심었던 탐욕, 오염에 찬 물. 저주를 원망한 집단, 악질이 된 물. 저주를 담아낸 아이, 되돌아 간 물.
누군가 몰래 버렸던 사악한 찬물. 아이가 커서 여인이 되면 뱃속에서 따스한 욕망의 물로 바뀐다. 마법을 푸는 것은 누구인가? 만약 당신이라면 선택을 동반한 필요를 안고 달리기를 할 준비는 됐는가?
모든 걸 잃게 된 어느 날, 궁상맞은 몸을 이끌던 당신은 어떤 소리를 듣는다. 그 물이 당신을 부른다. 따스함으로 세상의 거짓에 식어버린 그대, 차가운 몸을 적셔줄 처녀의 물이 말을 한다. 한 늙은이가 평생을 찾던 보물은 당신을 부르는 생명수가 되어 가락을 친다.
줄줄 새는 물을 빼내려면 혼자 만으론 불가능하네.
뜨거운 사랑만이 열쇠.
그대가 고기를 낚을 때도, 길을 걸을 때도,
해를 반사한 거울이 눈을 치면 갇힌 물길을 바닥에 풀어주려
눈 쌓인 산을 안아버린 집을 향해 달려야 한다. 붉은 다리 아래 쏟아 내린 샛물에서
낚시꾼들이 고기를 낚도록 달려야 한다. 넘치던 물이 줄어들고 부르던 목소리가 조용해져서 그대가 가야 할 이유 딱히 없어도 의심은 말아야지. 마른 창구는 여전히 물을 뿜고 있고
마음은 흥건히 젖어있으므로 허욕과 시기를 놓아주고 가린 눈을 푼다면 바다를 막은 방파제는 짠 물을 솟구치며
사랑만을 높이 노래하리라.
집에 오면서 앞으로 미래에 대해서 거창한 계획은 없으니 어떻게 나를 풀어줄까 생각했다. 삶에 대한 욕구가 대단한 것인지 틈새 없는 시장에서도 하고 싶은 것들이 끊이질 않는다. 곰곰이 고민했는데 내일 숨이 다한다 해도 그물 안에서 배회하는 몸을 그대로 놔두진 못하겠다. 시간이 될 때마다 물기둥처럼 솟는 욕망에 접근하면서 살고 싶다. 현재를 대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싶을 땐 그리고, 쓰고 싶을 땐 쓰고, 말하고 싶을 땐 말하고, 오직 나에 대해서만 말이다. 타자와 합의가 아닌 일방적 공유로 접어들 땐 나의 의지는 비의지가 되니까 이 방식은 잠시 보류한다. 버려버릴 게 아직도 산더미다. 내놓아야 할 물건은 거의 없지만 마음속의 물건은 늘어간다. 세상의 틀에 맞춰 사는 것은 이미 기준에서 벗어난 환경과 별난 조건들로 힘들게 되었다. 하지만 정상치로 간다 해서 행복했을까?
본성이 추구하는 기대는 남들과는 다른 길을 달린다. 가끔 타인과 같이 가는 길이 불편하고 어색하다. 동일한 기호 체계를 쓰면서 다른 세계에 놓여 있음을 느낄 때만큼 타인과 동떨어진 상태는 없다. 벗어버릴 수 없는 갈증과 물밀듯이 솟는 욕구를 해결해 줄 상대를 기다리진 않는다. 혼자 펌프질 하려면 시간이 곱절 이상 필요할 것이다. 스스로 표현할 시간이 주어지고, 자유로이 길을 걸으면 얼마만큼 욕심을 낼까? 아직까지는 그것조차 판단이 안 선다. 발이 차가워서 정신이 깨는 것인지 조인 자물쇠를 풀어보려 다리 위에 따뜻한 물을 흘려봐야겠다.
2004. 12. 30. THURSDAY
과거의 기록들을 읽다 보면 세상을 휩쓴 풍파는 여전했고 거대했음을 기억한다. 2004년 12월 인도양 지진해일(2004 Indian Ocean earthquake and tsunami)로 인해 일대의 16만 명이 한순간에 사망했고, '쓰나미'라는 단어를 인지하게 된 자연재앙의 신호탄을 바라보면서 얼굴 가득 피어오르는 소름을 목격했다.자연이 더 이상은 세상을 끌어안기 힘들다며 울컥 내보내는 신호는 인간의 범위로는 극복하기 어렵다. 천재지변과 인간들이 만들어낸 인재는 마음속에 남는 응어리도 다르다. 인간들이 적어내는 이야기와 토해내는 그림들은 타자와의 융합보다는 어긋남과 비틀림, 갈등과 비탄들이 격정의 주를 이룬다. 서정시나 교향악처럼 평탄한 선율은 번화로운 도시에서 지긋한 감흥을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사람들의 흉악하고 이기적인 언사를 살필 때마다 내 마음도 그렇지 않은지 지레 놀라곤 한다. 이미 미래의 수를 읽고 있다는 것은 나도 그만큼 검게 물들어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밀어내고 채워 넣고, 우물 속의 물은 계속해서 마시고 사용하지 않으면 바닥을 채우는 것을 멈춘다. 조용히 스며들듯이 우묵한 공간을 차지하는 물길처럼 삶에서 흐르는 새로움이 그만의 온도감으로 온몸에 가득 채워진다면 간헐적으로 썩어버릴 아픔은 조용해질 것이다. 얼음처럼 차가운 계절에 따뜻한 물이 바닥에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