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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Dec 13. 2024

KAFKAESQUE POTEMKIN

《빠촘킨》 발터 벤야민, 카프카(KAFKA)를 읽다가

[KAFKAESQUE POTEMKIN] 2024. 12. 13. PHOTOSHOP. DESIGNED by CHRIS


 빠춈킨의 우울증은 거의 정기적으로 재발되곤 했다. 때로는 길게, 때로는 조금 짧게 지속되곤 했던 이상한 증세. 그의 병이 발동할 땐 사람들의 접근이 금지되었고, 방 출입도 엄격히 제한되었다. 그리고 궁정의 어느 누구도 빠춈킨의 우울증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넌지시 운만 띄워도, 카타리나 여왕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었다. 한 번은 빠춈킨의 우울증이 이례적으로 오래 지속된 적이 있었는데, 이에 심각한 폐단이 생겨났다. 여왕의 처리요구 서류들은 빠춈킨의 서명이 필요했지만 그의 병 때문에 승인이 되지 않은 서류들이 쌓여만 간 것이다. 고관들은 어떻게 할지 몰라서 쩔쩔매기만 했다.  


 한 번은, 우연히 슈발킨이라는 하층 서기관이 재상관방으로 통하는 대기실에 들어왔다가 추밀원 고관들의 탄식과 불평을 듣게 되었다. 충직한 슈발킨은 이 골칫거리 서류처리에 앞장서겠다고 나섰다. 고관들은 손해 볼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그에게 서류를 맡겼다.  듬직한 슈발킨은 서류뭉치를 팔에 끼고 회랑복도를 지나 빠춈킨의 침실로 걸어 들어갔다. 빠춈킨은 소맷부리가 닳은 잠옷을 입고 어스름한 침대 앞에서 손톱을 씹으며 앉아 있었다. 슈발킨은 말없이 책상 앞으로 다가가 펜을 잉크에 담갔다가 그 펜을 빠춈킨에게 쥐어주었다. 첫 번째 서류를 무릎 위에 놓자, 빠춈킨은 한참 동안 뜻밖의 침입자를 넋 나간 시선으로 바라본 뒤 마치 잠결에서처럼 서류에 서명을 했다.


 두 번째에도

 세 번째에도

 마지막까지.


 서류의 서명이 끝나자 슈발킨은 들어왔을 때처럼 아주 거리낌 없이 서류뭉치를 팔에 끼고 방을 나갔다. 그가 의기양양하게 서류를 흔들어 보이면서 관방 대기실을 들어가자 고문관들이 달려들어 서류를 손에서 빼앗아갔다. 기대감으로 서류를 바라보던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마비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슈발킨은 다시 다가가 당황해하는 이유를 물었다. 고문관의 손에서 서류를 훑던 그의 시선이 서명란에 멈추었다. 모든 서류들이 슈발킨, 슈발킨, 슈발킨…이라고 서명되어 있었다.



 빠춈킨(Potemkin)의 이야기는 허약한 결정자의 정신 나감과 기계처럼 굴러가는 관료주의적인 조직생활에 관해 허탈한 비판에 젖게 만든다.


 "아, 이게 뭐지?"


 관부에 있는 사람들에게 냉철한 위기관리 능력과 인간적인 관대함을 논하지 말라. 틀 안에서의 움직임은 지적일수록 엉망이고, 진취적일수록 허점투성이다. 이 세상은 작은 우물이다. 그 안에서 놀고 있는 개구리들은 비가 오기 전 그 조그만 바다가 넘실댈까 봐, 검고 동그란 하늘을 바라보며 잠시 울었을 뿐인 것을.


2007. 1. 19. FRIDAY



 정치판의 이야기는 웬만한 희극보다 더 웃기는 난장판이다. 권력의 수식관계는 쇠심줄처럼 고집 센 아버지들의 삶과 같이 낡은 소매를 휘두르길 고수한다. 어두움에 사로잡혀 오류 투성이의 얼굴을 빳빳하게 든다. 긍정할 수 없는 행위의 이유를 기본 논거로 제시하는 권력가들은 우울하게 퇴색한 의식처럼 결정의 권한들을 가차 없이 내지르며 타인들이 따라오든지 말든지 자괴감에 사로잡힌 채 급박한 세상사에 초연하다. 초현실로 넘어가는 작가들의 의식세계는 현실의 무의미성을 넘어 부조리한 세태에 대한 무긍정과 초비판이 혼재된 결과이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문예사적인 카프카의 재해석, 《빠촘킨 Pachomkin 읽으면서 기발한 구성에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빠촘킨의 우울함과 기면증과 같은 멍함이 인상적이었던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단어적인 연상의 전함 포템킨(The Battleship Potemkin)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보통 정치가들의 연설들은 한정된 우물 안에서 메아리치는 개구리들의 왕왕거리는 울음소리와 닮았다. 짝짓기 비명을 지르는 모기 흡혈을 위한 무한 도전은 기가 차게 전투적으로 확성되어 세상 안에서 소용돌이친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국일보 논설주간 이강희(백윤식)인상적인 대사가 있다.


 "어차피 대중들은 개 돼지입니다.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


 지도층과 지식인들의 의식이 고매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행동을 극대화할수록 언어를 과격하게 가질수록 자극에 길들여진 광기의 지지층이 모이고 권력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며 기억 상실과 망각의 원리를 믿는 권력자들이 많다. 언젠가 침묵으로 역사 속에 소등될 날들은 이 공간을 함께 공유하고 시간을 공통으로 사용하는 자들이라면 예외 없이 해당된다. 시간의 눈을 감아버리는 순간 인간들은 기나긴 패배에 접어들 것이다. 타국 언론의 입을 빌어 임기말 증상인 레임덕(Lame Duck)이 아닌, 회생불가의 데드덕(Dead Duck)의 표현이 쓰이는 한국 정치 현실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권력을 손쉽게 쥐어주는 사람들의 생각 없음과 권력을 실행하는 자들의 자충수와 오만함이 한데 뭉쳐진 계층사회의 누수현상은 우울의 늪에 빠져 정신이 혼미해진 빠촘킨과 권력자 옆에 들러붙은 기생수들의 무지함이 혼재된 결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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