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fred Joseph Hitchcock, 1899-1980] POSTER COLLAGES by CHRIS
"야! 이 싸이코 같은 것아."
자주 귓가를 어지럽히는 말이다. 내가 사이코틱 (Psychotic)한가? 전혀. 하기사 미친놈 치고 자신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이코(싸이코 Psyco)의 정의를 가장 잘 표현한 영화감독은 제목과 주제를 적절하게 쓴 히치콕(Alfred Joseph Hitchcock) 일 것이다. 샤워 커튼 속 날카로운 쇳소리에 둔탁한 칼질. 쓰러지는 여인의 금발 머리. 어지럽게 클로즈업 되는 흑백의 현장. 물 따라 흐르는 검고 흐늘진 피. 춤을 추듯 요동치는 여자의 그림자 형상 사이로 흥겹게 젖혀진 목젖. 경기를 일으키는 듯한 급박한 경고음. 늪으로 꾸역꾸역 가라앉는 차(車). 을씨년스럽게 불어대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싸이코 Psycho 1960> 이 영화 한 편으로 신격화된 히치콕은 두터운 사이코틱 마니아들에게 온몸을 해부당하고 있다. 히치콕은 신조어를 심어준 감독이다. 카메오(Cameo), 맥거핀(MacGuffin), 사보타주(Sabotage), 현기증 기법(Vertigo Effect) 등등. 히치콕 영화는 <구명보트Life Boat 1944>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한 명의 권력이 남의 피와 생명력을 갉아먹다가 결국엔 반란이 숨통을 끊어버리고 바다로 내던져진 육신들. What For, Where To…. 종점에서 깨닫는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남는 건 사랑의 감정과 지나간 추억이며 힘겨운 발악과 우울한 체념이다. 전쟁포로를 잡아놓고 그에게 복종하는 우리들. 죽음 앞에선 그 누구도 방만한 구경꾼이 될 수 없다.
간료한 조명을 통해 가장 어둡고 환하게 비출 수 있는 명암의 성격을 지닌 인간을 골라 집은 히치콕. 그가 카메라에 씨를 뿌렸던 영화는 집 근처 영화마을의 작은 울타리에서 꽃을 피웠다. <사보타주 Sabotage 1936>, <구명보트 Life Boat 1944>, <오명 Notorious 1946>, 〈다이얼 M을 돌려라 Dial M for Murder 1954〉, <이창 Rear Window 1954>, <나는 결백하다 To Catch a Thief 1955>, 〈현기증 Vertigo1958〉,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North by Northwest 1959〉, <싸이코 Psycho 1960>, <새 The birds 1963>… 수두룩하게 쌓아두고 틀고 또 틀었던 늘어진 테이프 아래 내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열심히 보다 보면 계속 헛다리 짚게 만들고 결국엔 혼란함과 별스런 서스펜스로 몰아넣었던 속임수. 그 재미가 꽤 흥미로웠다는 생각으로 자고 나면, 또 그 내용을 다 잊고서 지내게 되는 허상의 꿈. 그런 일탈진 공허함이 그의 영화를 계속 보게 만들었던 유혹의 미끼였다.
인간의 질투와 끈적한 소유욕과 황금빛 돈에 대한 집착들이 박제된 새 같다는 생각이 든다. 환상을 겪는 우리들. 하나의 마음속에 두 마음이 있으면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누가 지킬박사가 될까, 누가 하이드 씨가 될까. 선택은 자기의 몫이다. 그런데 히치콕은 어느 영화에서든 여자를 관능적이고 섹시한 팜므파탈로 만들면서 심히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스러운 자기 부인 때문이겠지. 시나리오 작가인 엘머 레빌(Alma Lucy Reville, Lady Hitchcock)은 지적인 분석력과 날카로운 매의 눈을 가진 영화 편집자였다. 히치콕은 영화를 만들고서 엘머가 시사회장에 나타나면 침을 꼴딱 삼켰다고 한다. 아내가 지루해하거나 날카로운 지적을 퍼부으면 밤새 고민하고 컷팅을 했다던 순박한 아저씨. 아무리 날고 기는 명감독이라도 자신의 작품세계를 충실하게 바라봐주는 조언자가 없으면 그 찬란한 빛도 맥없이 잃게 된다는 걸 일찍이 알았나 보다.
2004. 9. 22. WEDNESDAY
히치콕의 작품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거쳐가야 할 관문이었다. 활자와 영상에 중독된 학창 시절, 근처 비디오 대여점을 돌면서 희귀작을 찾아다니던 터라 자주 가던 비디오 대여점에 히치콕 시리즈가 들어온 것을 보고 며칠밤을 새면서 봤다. 사실 히치콕이 구성하는 플롯의 전개는 내용의 밀도감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영화를 보다 보면 시나리오의 공백이 엉성하게 보이기도 하고, 생략된 내용에서 갑자기 구덩이에 빠진 듯한 기분에 젖어들곤 한다. 심리적인 불안함을 조성하는 서스펜스(Suspense)는 이야기를 구성하는데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긴장감과 곧 터질 시한폭탄에 뇌가 쫄리는 기분을 전해준다. 미술학도로서 영화와 연극, 문학과 음악에 관심이 가득했던 히치콕은 인간 감정의 서스펜스를 고무줄처럼 유연하게 조절한다. 영화인들이 히치콕에게 오마주(Hommage)를 바치는 데는 대상에 급격하게 다가서거나 물러나는 창의적인 카메라 기법과 인물들의 전형성을 뒤틀어버리는 편집의 투명성, 감정의 백치미로 오인되는 창백한 이성의 현기증, 예상을 엇나가는 불안하고 비정상적인 인간의 심리를 제한적 기술을 넘어 혁신적으로 해석하는 능력 때문일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 동굴 속에 가둬둔 트라우마와 과거의 경험들이 있다. 주변 세계를 이해함에 있어 자기만의 주관은 있어야겠지만 개인적 행동의 잘못이나 오류, 불행한 상황을 주변에다 전가하는, 사이코틱 에피소드(Psychotic Episode)로 흐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환각이나 망상, 비정상적인 사고, 비논리적 언어상태, 조현병적인 태도, 양극성 장애, 우울감과 약물남용과 같은 급격한 감정 왜곡의 변화로 말미암은 비극적인 사건 전개는 현대의 영화와 문학만이 아니라 응용예술에서 많이 다뤄지는 주제이다. 이런 비극적인 태도가 만들어낸 세상은 살인과 파업, 거짓과 불안이 가득한 세계이고 안정감이 주어지지 않는다. 여기에는 자신에게는 긍정성이, 타자에는 부정성이 돌출되어 남 탓만이 존재할 뿐, 어두운 현실을 타개할 방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현실의 당위성은 존재하지 않는 불합리한 세계에서 불안한 인간의 내면을 심층적으로 다루기보다는 모두 그런 기괴한 인물을 만들어낸 뭉텅이의 사회에다 그 탓을 돌린다. 이는 음주운전을 하거나 살인, 마약을 해도 힘이 있으면 풀려나는 정•재계의 자식들과 같이, 권력과 돈의 힘을 정당화하는 사회적인 태도를 부정하면서도 반대급부적으로 이를 추종하는 대중적인 심리를 양산해 낸다.
인간의 내면을 이루는 개별적인 구성은 거대한 사회와의 충돌 이전에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존재하고, 그 작은 공간에서의 수많은 이야기가 변질되는 것이 기본이다. 우리가 정서적으로 기대하는 안락한 가정이란 울타리는 이미 공식적으로 선언된 가족의 해체처럼 개인을 보호하지 못한다. 히치콕의 인물들은 한마디로 <싸이코>라기보다는 작던 크던 일정한 공간 속에서 반응하는 평범한 인간들의 기본적인 심리와 하나의 사건이 놓이는 장치 구성과 조건 변화에 따라 급변하는 감정 상태와 연결된 행위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야기의 사건전개에서 아무런 연유 없이 어떤 탈출장치도 마련하지 않고 단순히 과격하고 폭력적인 행위에 중독된 감독이나 내외적인 조절 균형을 상실한 작가들의 서술적인 태도는 철저하게 비판적인 대상이 되어야 한다. 액션(Action), 범죄 스릴러(Thriller), 누아르(Noir)라는 장르도 있고 육체를 난도질하는 슬래셔 무비(Slasher film)도 있지만 흥미를 자극하기 위해 아드레날린적으로 무조건 때려 부수고 재미로 살해하고 답답하다고 폭력을 행사하고 실없는 농담을 전시하는 대형 매체 제작자들과 영상 감독들, 작가라는 이름이 붙은 이들도 정신 차려야 한다. 한국 조폭영화가 흥행 가도를 달리며 극장가를 장악하던 밀레니엄 시기, 폭력적인 화면 구성에 대해 한바탕 설전을 벌이다가 손을 들었다. 이후 영화판은 지금까지도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희망찬 제목을 뒤틀어 <깍두기들에게 희망을> 주고 말았다. 영상의 힘은 머리에 잘못된 인식조차 꽤 그럴싸한 의미로 심어놓는다. 인류의 사고를 구성해 온 글자에는 사람들의 호기심이 떠났고, 진지하게 자신에 대해 바라보는 이도 드물다. 시나리오의 바탕이 되는 잘 나가는 소설들도 자각 없이 보면 정말 싸이코라고 볼 수밖에 없는 작가의 정신상태에 휘말리게 된다. 한마디로 미친놈 이야기를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좋다고 그런 아류들을 계속 생산하고 피리 부는 떠돌이를 따라 정신 실종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이다.
피가 흥건한 폭력의 전시(展示)는 전시(戰時)의 인간을 무감하게 하고 살인조차 방관하게 만든다. 의미 없는 공허한 내용들로 자신을 보여주는 태도 또한 그 거짓을 가장 잘 아는 자신을 한마디로 말아먹게 만든다. 도박으로 돈을 벌다 보면 도박으로 패가망신하고 폭력으로 돈을 벌다 보면 폭력으로 폭망 하는 것이 삶의 이치이다. AI부터 카메라워크도 화려해진 현대의 영상 과학기술이 장면과 숨소리 하나조차 연구자 마인드로 접근하던 초창기 작가들의 상상력에 비해 호소력이 약해진 것은 테크닉적인 겉핥기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보고 나면 가슴에 남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손가락 사이로 모든 것이 빠져버리는 느낌은 시간적 공허만이 아니라 제작적인 태도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시간적 소비에 집중하게 만드는 오락으로서의 기능은 작가주의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 가야 할 방향성은 아니다. 넷플릭스건 디즈니건 애플이건 유튜브건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선택의 방향이 제한되고 의미로운 이야기가 사라진다는 사실은 단순히 취향의 문제가 아닌, 소비적 대중사회에 집중하는 생산자들의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중간자만이 포식하고 거대해지는 세상. 살아남기 위해 부득이하게 타자와 동일한 물건을 생산한다고 해도, 힘을 길러서 나의 언어로써 나의 손길로써 두 눈을 바로 뜨고 나만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 매일 같이 쏟아지는 영상과 글들이 많아진 세상에서 어디에 초점을 둬야 할지 방황하는 시선을 지닌 상태로 지난 시절의 비디오테이프를 트는 것은 단순히 라떼용 회상이라기보다는 나아갈 방향을 확인하는 자기 점검용의 성찰로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