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cient Futures: Learning from Ladakh, Helena Norberg Hodge]
라다크(Ladakh)의 검약이란 단어는 작은 것에서 더 많이 얻어내는 것을 뜻한다. 제한된 자원을 인색하게 줄여 쓰는 것이 아니라, 낡은 것들에서 새로운 용도를 찾아내는 지혜로움. 지속 가능한 에콜로지. 시간을 느슨하게 바라보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곳에서 “내일 한낮에 만나러 올게. 저녁 전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상대방이 언제 올까 마음을 졸이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너그럽고 멋진 말인가!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Helena Norberg Hodge)의 《오래된 미래 Ancient Futures: Learning from Ladakh》는 여성과 남성의 역할이 균형을 이루었던 라다크 지방을 탐험한다. 지혜로움으로 가득한 여인, 자비로움이 넘치는 남자. 이들의 두 날개가 균형을 이루며 공(空)의 철학을 실천하는 풍요로운 존재들의 삼사라. 이곳에서 마모되는 서구와 낡아가는 라다크의 모습을 고찰하는 그녀의 시선은 가히 명상의 기록이라고 부를 만큼 낭랑하면서도 매듭이 강하다.
만물이 이와 같음을 알아라.
신기루이며, 구름의 성,
꿈이요, 환영인 줄을.
본질은 없고, 보이는 성질만 가지고 있는 것.
만물이 이와 같음을 알아라.
달이 호수로 옮겨간 일이 없는데도
밝은 하늘의 달이
맑은 물에 비친 것과 같음을.
만물이 이와 같음을 알아라.
메아리치는 음악에서 소리와 흐느낌을
얻어 지니지만 그러나
메아리 속에는 멜로디가 없다.
만물이 이와 같음을 알아라.
마술사가 말과 황소와 수레와 또 다른 것들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아서
아무것도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는 것을.
<사마디라자수트라 Samādhi-rāja Sūtra, 삼매왕경>, 《오래된 미래》의 불교, 삶의 한 방식 중에서
라다크는 매력적이다. 죽음에 대한 이곳의 시선은 이별을 두려워하는 우리와 사뭇 다르다. 늙음에 대해서 주름이 생긴다고 호들갑을 떨지 않고 친한 누군가가 떠난다고 해서 크게 서러워하지 않는 라다크인을 관찰해 왔던 호지에 의하면 죽음은 끝인 동시에 시작이고 하나의 태어남에서 그다음의 태어남으로 가는 과정이며 최종적인 해체가 아니라 끊임없는 순환이다. 그들도 우리들처럼 슬픔에 대한 고민을 안고 있지만, 절망과 분노는 실제의 정도의 문제가 심하기 때문에 집착이 희미하다. 먼지투성이의 길에서 나는 얼마나 사람들과 목젖을 울리며 호탕하게 웃어보았는가. 내가 가난을 느끼는 것은 당신이 절대적인 비교의 잣대로 나를 심판하기 때문이며, 나의 옹졸한 마음이 자유를 떠나보내고 괴로움을 참지 못해 울먹였기 때문이다. 아직도 계절을 보내고 아쉬움에 떨고 있는가.
세계가 물질을 향하여 달려갈수록 인간들의 위장은 허덕였다. 자유무역과 독립체제를 옹호하는 자들이 배부를 때, 한쪽의 오염은 다리를 적셨다. 대안 발전(Counter-Development). 불법화된 약품들의 천국 속에서 어떤 태도를 유지하고, 작은 것이 아름다운 낙원의 언덕에 누워 푸른 하늘로 한숨을 날려 보낼까?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정립은 자연과 세계, 나와 타인이 구김 없는 삶의 기쁨을 누리고 마음속의 평화를 얻는 것, 그것의 실천은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 것이다."
듣다 보면 여전히 뭉툭한 발언이긴 해도 매일이 단편화되고 슬픈, 홀로 남은 이 거리에서 호지의 이야기는 전등불을 켜기 위해 소모되는 사람의 피와 기름, 굵은 소금 단지를 태우면서 대도시의 불나방이 되어가는 존재를 돌아보게 했다. 하루살이로 마감되는 인간, 전깃불에 구워 먹히는 인간들 사이로, 생태학적인 침식을 관조하지 않는 시대를 그대로 따라갈 수 없다. 잠시 멈추었던 것은 퇴보가 아닌, 태양이 그려내는 나 자신을 그대로 보기 위함이니까.
2005. 10. 19. WEDNESDAY
"오래된 미래 Ancient Futures"를 들었을 때 과거와 미래가 섞인 듯한 공감각적인 심상이 밀려왔다. 흡사 공상과학 판타지 영화에서 그려지듯, 미래에서 온 사람이 수백 년 전의 어느 날에 떨어져 과거와 미래 사이에 걸쳐진 듣도 보도 못한 오묘한 향수를 맡게 되거나 미래에서 갖지 못하던 뜻밖의 신선함을 느끼는 감상과 맥락상 비슷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오래된 미래는 달리 말한다면 기독교인들이 불교의 사상을 들으며 성경과 비슷한 가르침의 구절에 빠져들거나, 서구인들이 상상하는 정적인 동양에 대한 신비한 미련이나 환상의 형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시간이 흘렀으니, 과거에 만지작거리던 삶에 대한 인상을 흔들어본다. 한때의 과거와 다가올 미래의 공존은 어디에서 가능할 수 있을까. 그 끈은 결국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 이미 객관화되고 분리된 현대 사회에서 진보적인 경제모델을 갖춘다고 해서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행복함의 결정을 이끌어내긴 어렵다. 많은 에콜로지 인류 학자들이 추구하는 전통적인 지혜가 주축이 된 공동체 중심의 삶은 사회적이고 긴밀한 시공간적 연결방식에 대해 강조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이상적인 모델로 다가가기 위해선 자신을 둘러싼 오늘의 사회적 현실을 파악함과 동시에 그 안에서 어제의 흐트러진 모습을 재정비하고 미래적인 자아를 재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발전, 즉 오래된 미래의 형상은 무조건 특출 나고 기존에 보지 못하던 거대한 폭풍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존재한 것에서의 형태를 흡수하여 전통적인 방식과 이론적인 방향을 재평가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새롭게 설계하는 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