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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 May 05. 2023

아일랜드의 슬픈 역사, 보비 샌즈

27살 청년이 정부에 항거하다가 66일의 단식 끝에 굶어 죽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가 단식 와중에 국회의원 후보로 옥중 출마하여 당선된 현역 국회의원의 신분이었다는 점이다. 드라마 같은 일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그런 일이 우리가 민주주의의 모국으로 알고 있는 영국에서 벌어졌다는 점이다. 그것도 민주주의가 채 정착되기 이전도 아닌 1980년대에.


보비 샌즈(Robert Gerard Bobby Sands, 1954.3.9-1981.5.5)

그는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Belfast)에서 태어나 버스 조립공장에서 견습공 신분으로 일하는 노동자였다. 18세 나이인 1972년 영국 정부의 재판 없는 구금조치에 항의하는 비무장 상태의 아일랜드 구교도를 향해 신교도가 주축이 된 영국 치안군의 무차별 살육으로 14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하는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 사건을 목격하고는 아일랜드 공화국군(IRA, Irish Republican Army)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77년 무기소지 혐의로 체포되어 1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샌즈는 복역 중이던 1980년에 IRA의 지도자로 선출되었으며 북아일랜드 지역구에서 당선되어 영국 하원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IRA 수감자들의 정치범 대우를 요구하며 벌인 두 차례에 걸친 단식 투쟁 끝에 1981년 5월 5일 새벽, 단식 66일 만에 감옥에서 굶어 죽은 것이다. 



약자의 죽음으로 종료될 줄 알았던 투쟁은 더 큰 불꽃이 되었다. 그가 굶어 죽자 북아일랜드 전역에서 폭동이 발생하였고 하루에만 23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이 사건으로 "테러리스트와는 협상하지 않는다."는 기조를 고수하던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가 총리로 나라를 이끌던 영국의 국제적 이미지는 큰 손상을 입게 되었고 이후 북아일랜드 분쟁을 둘러싼 갈등은 더욱 격렬한 투쟁으로 확산되었다.


현재 인구 약 500만 명의 아일랜드는 한때 유럽에서 가장 낙후한 국가였으며 미래를 기약하기 어려운 희망 없는 고국을 포기한 국민들이 해외로의 탈출구를 찾으러 고향을 등지는 지역이었다. 헨리 2세가 아일랜드를 침공한 것이 12세기였는데 1534년에는 헨리 8세가 본격적으로 아일랜드 침공을 감행하여 1542년에는 아일랜드 왕위를 만들고 스스로가 잉글랜드 왕과 겸임하여 아일랜드를 복속하였다. 


이후 1801년 아일랜드는 영국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어 20세기에 들어와 독립을 이루기까지 사실상 8백여 년을 잉글랜드의 지배 속에 있었다. 잉글랜드는 아일랜드 인들을 ‘하얀 검둥이’로 부르면서 차별하였고, 토착 언어 사용을 금지하고 영어를 사용하게 하는 등 민족 말살정책을 시도했다.


영국의 잔혹한 통치 속에 1845년에서 1852년 기간에는 대기근이 닥쳐 약 1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그 무렵 150만 명 가까운 많은 아일랜드 인들이 영국의 차별과 박해, 그리고 굶주림을 피해 신대륙 미국을 포함해 해외로 이주하였다. 그 이후에도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민족적으로 차별받으며 끊임없이 착취를 당했고 내세울 것이라고는 비와 바람뿐인 거칠고 황량한 환경인 작은 섬에서 겨우 연명을 지속했다. 


이런 가운데 아일랜드 섬의 영국령인 북아일랜드에서는 양 민족 간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북아일랜드 문제의 실질적 갈등의 기원은 17세 초에 정부의 비호 아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신교도 주민들이 아일랜드 북쪽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영국은 아일랜드의 토착귀족을 몰아내고 신교도 영주들을 대거 이주시켰으며 신교도들은 아일랜드 구교도들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 대부분을 강제로 빼앗았다. 이것이 훗날 양측 간 분쟁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으며 신교와 구교로 서로 다른 종교적 배경을 갖고 있던 세력 사이에 충돌이 끊이지 않고 계속된 것이다. 



충돌은 1960년대 후반까지 가톨릭계 주민들과 영국계 개신교 주민들 간에 수시로 발생했는데 현실은 수적으로나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던 개신교 주민들의 일방적인 가톨릭계 박해에 가까웠다. 당시 북아일랜드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친 영국 진영 일부에서조차 아일랜드계 차별을 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고 여기에 일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이 희망을 갖기도 했지만, 다수의 친 영국 진영은 그러한 의견을 무시했다. 그 결과 아일랜드계 주민들은 희망을 잃고 시위와 테러 등 본격적인 실력행사에 나서게 된다. 


오랜 기간 양 진영 사이에 대립과 충돌이 지속되는 가운데 결정적으로 1972년 1월 30일, 아일랜드계의 시위를 진압하러 온 영국군 공수부대가 데리(Derry) 시에서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던 비무장 시위대에게 발포하여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데리 지역은 북아일랜드에서도 아일랜드계에 대한 차별이 유난히 심각했던 곳이어서 개신교-친 영국세력 가톨릭-아일랜드 민족주의 진영의 갈등이 심각했고 양측 모두 시위와 폭동으로 많은 피해가 발생하던 곳이었다. 


이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7월 21일에는 IRA가 벨파스트에 폭탄을 폭파시켜 9명이 사망하고 130여 명의 부상자를 낸 피의 금요일(Bloody Friday)’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피의 일요일’ 사건은 북아일랜드 분쟁을 격화시키는 사건 중 하나가 되었고 이를 계기로 IRA는 본격적으로 조직을 갖춘 준 군사 무장단체로 성장하게 된다.


이 사건은 그동안 무차별적인 IRA의 테러 활동에 거부감을 보이던 아일랜드 가톨릭계 주민들이 피의 일요일 사건에서 보여준 영국군의 잔인한 행동으로 인해 IRA의 활동이 정당하다고 느끼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당시 지지가 약화되고 있던 IRA 과격파에게 명분을 제공하였고 이들의 활동이 적극적이고 격렬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이다. 


이후로도 영국군의 진압이나 소탕작전으로 무고한 북아일랜드 주민들이 죽어나갔고 이로 인하여 유족이나 친지들이 IRA에 들어가거나 소년병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보비 샌즈가 채 스무 살이 되기도 전인 18세 나이에 아일랜드 공화국군에 가입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분쟁의 궁극적인 원인을 따지고 보면 1970년대까지도 주거, 취업, 참정권에서 가톨릭계를 차별했던 개신교가 지배하던 북아일랜드 의회와 이를 철저히 방임했던 런던 영국 정부에 있다. 북아일랜드는 1970년대까지도 1인 1표의 보통 선거제가 아니라 보유한 재산에 따라 투표권을 주는 제한 선거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경제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가톨릭계는 정치적으로도 제대로 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런 갈등과 충돌 속에서 전 세계적으로 1960년대 미국에서 발생한 ‘흑인민권운동’과 당시 유럽을 휩쓸던 ‘68 혁명’의 영향을 받은 비폭력 시민 저항운동이 시작되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아일랜드계에서도 불만이 고조되던 중에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인하여 영국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였고 '평화적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라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무력 충돌이 본격화된 것이다.


학교에서 같이 공부했던 아일랜드 출신의 오브라이언은 1972년 힘없는 주민들을 상대로 영국 치안군의 무차별 살육이 벌어진 ‘피의 일요일’ 사건이 벌어진 바로 그 장소인 북아일랜드의 데리(derry) 자신의 집 2층 방 창문을 통해 두려움에 떠는 어린아이의 눈으로 현장을 목격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영국과 아일랜드, 그리고 영국의 통치지역 중 하나인 북아일랜드 안에서 가톨릭계인 아일랜드 인들과 개신교인 영국 세력 간 갈등과 충돌은 이런 역사적, 정치적, 종교적 배경을 떼어놓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 까닭에 미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은 영국에 대한 적대감이 여전하며 아일랜드 인들의 반영(反英)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경향을 오늘날까지 드러내고 있다. 


아일랜드계인 클린턴 대통령은 임기동안 세 차례나 북아일랜드를 방문한 바 있으며 1994년에는 영국 정부가 테러단체로 규정한 IRA의 민족파 지도자 게리 아담스(Gerry Adams)에게 비자를 발급함으로써 영국 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하였다. 현재 미국에서 아일랜드계는 약 3500만 명으로 미국 전체 인구의 12%에 해당된다. ‘대기근’의 시대에 미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계의 후손들 상당수는 지금도 대기근이 자연재해가 아니라 영국의 정치적 차별로 인한 재앙이었다고 믿고 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아일랜드 인들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오늘날 1인당 국민소득이 영국에 접근하는 경제력을 가진 국가로 성장했다. 과거부터 지속되어 온 고난의 힘든 환경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아일랜드 사람들에게는 어떤 역경 속에서도 고난을 극복하고 목표를 성취하려는 강한 의지가 담긴 DNA가 있는 모양이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 앤드류 잭슨, 윌리엄 맥킨리, 테어도어 루스벨트, 윌리엄 태프트, 우드로 윌슨, 허버트 후버, 해리 트루먼, 존 F 케네디, 지미 카터, 로널드 레이건, 조지 부시父子, 윌리엄 클린턴, 버락 오바마 등 스무 명이 넘는 인물들이 아일랜드계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길지 않은 이민사에서 이뤄낸 놀랄만한 성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에는 미국에 거주하는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이 북아일랜드에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면서 조상의 나라 아일랜드에 대한 그들의 애정을 과시한 바 있다. 


케네디에 이어 역시 아일랜드계 족보에 가톨릭 신도로 자신이 아일랜드계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얼마 전 할아버지의 나라를 방문한 사실이 TV에 방영된 적이 있었다. 그가 조상이 살았던 고향마을을 방문했을 때 동네 주민들이 나와 마치 오랜만에 고향을 방문한 먼 친척을 반기는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환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일랜드 인들은 역경을 극복하고 힘없던 자신들의 조국 아일랜드의 이름을 빛내고 희망의 등불이 되어준 인물들을 그렇게 기리며 발전하고 있다, 


고통스러운 수감생활 중 보비 샌즈가 감옥에서 화장지에 시를 적어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알린 우리에게도 익숙한 유명한 시구가 있다. 


“한 마리 종달새를 가둘 수는 있어도 그 노래를 가둘 수는 없다.”



우리도 아일랜드처럼 열악한 지정학적 환경 속에서 이웃의 강대국들로부터 수없이 많은 고통의 역사를 경험했다. 한반도에서 국가의 탄생이 시작된 이래 한순간도 이웃 국가들로부터 위협을 느끼지 않은 순간이 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립과 충돌이 반복된 역사 속에 될성부른 인물은 성장하기도 전에 뿌리째 뽑혀버리고, 존경받을만한 인물들의 국가를 위한 충정은 갈등을 부추기는 사리사욕에 빠진  패거리들로부터 내팽개침을 당하는 악습이 여전하다. 다행스럽게도 6·25 전쟁 이후에는 뛰어난 리더십과 국민들의 자각, 그리고 가정을 책임지려는 가장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희생으로 경제선진국으로 성장했다. 


주변국들로부터의 위협은 여전하지만 우리에게도 아일랜드 민족 못지않은 끈질긴 생명력과 미래를 향한 도전 의식의 DNA가 내재되어 있는 것 같아 다행스럽다. 미국으로 이주한 우리 한인들의 이민 역사가 한 세기가 훨씬 넘은 가운데 미국에서 대통령을 탄생시키는 성과는 요원하더라도 온 국민이 단결해서 국제사회에서 만만하게 보지 못하는 국가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ps : 마르크스의 사상을 멋대로 차용해서 모택동사상과 주체사상을 만들어 서구 사회주의 지식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은 모택동과 김일성처럼 우리나라에서 보비 샌즈의 아일랜드계 차별에 대한 저항의식을 제멋대로 가져와 자신들의 몰염치한 과거행태를 덮으려는 여의도 주변에 기생하는 ‘586 기생충들’과, 같은 노동자를 차별하는 민주노총계의 파렴치한 ‘귀족 전위부대’의 행태를 내려다보면서 샌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ps : 북아일랜드 갈등의 평화적인 해결을 통해 평화협정을 체결하는데 기여한 얼스터연합당(UUP) 당수인 데이비드 트림블(David Trimble)과 사회민주노동당(SDLP)의 존 흄(John Hume)은 1998년에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사진은 구글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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