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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 Jan 09. 2023

아테네 ‘철학자의 길’을 걸으며


그리스에서 온 마리아와 이태리에서 온 파올라는 매주 목요일 오후 유럽현대사(Contemporary European History) 수업이 진행될 때마다 충돌하곤 했다. 나같이 동양에서 온 학생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영국은 물론 프랑스나 스웨덴에서 온 학생들에게조차 그녀의 그리스 이름은 발음하기가 힘들어 우리는 그냥 그녀를 마리아로 부르기로 했고, 그녀는 흔쾌히 자신의 영국식 이름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현대사 수업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게 그리스에서 기원이 된 거”라는 주장을 곧잘 하곤 했다. 마침내 그녀는 고대 유럽문명은 ‘그리스-로마문명’이라기보다는 그리스 문명과 이를 이은 로마문명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마치 새로운 학설을 발견한 학자인양 주장을 했는데 급한 성격의 파올라는 뭔 가당치도 않은 주장을 하냐는 표정으로 마리아의 주장을 반박하곤 했다. 






이는 마치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 젊은이들 사이에 역사문제를 놓고 중국이 늘 자신들이 원조라고 주장하는 분위기와 흡사했다. 중국은 종종 근거조차 희박한 사실을 놓고 자신들이 종주국이라고 주장을 해서 비난을 받곤 하지 않는가. 


자신들이 축구의 종주국이라고 주장하다가 “실력으로 월드컵에 참가라도 해보고 그런 얘기를 하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았고, 김치와 한복도 자신들이 원조라고 주장을 해서 웃음거리가 되었다. 


기이하게도 여러 가지 정황상 ‘코로나 19’의 원조국은 분명히 자신들일 텐데 시침을 떼고 침묵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뻔뻔하기까지 하다. 


아무튼 그리스와 이태리 사이에 유럽문명에 끼친 영향력 논쟁을 놓고 마리아와 파올라는 늘 대립했다. (깊고 푸른 매력적인 눈을 가진 금발의 파올라는 수업 첫날 반갑다며 처음 만난 친구들에게 볼 키스를 해준 마음까지 아름다운 학생이었으므로 대부분 남학생들은 주장의 옳고 그름의 여부와 상관없이 그녀를 심정적으로 응원하였다). 


사실 마리아는 유럽의 수많은 작가가 자신의 작품 어디쯤에서, 그리고 철학자가 자신의 논지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심지어 거만한 정치인들조차 자신의 연설 말미에 라틴어 한 구절을 자랑스럽게 인용하곤 할 때 이미 고대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그리스-로마 문명의 균형추가 로마로 기울어진 사실을 눈치챘어야 마땅하다.






서양의 문예 부흥기에 이탈리아에서 발생하여 유럽에 널리 퍼진 정신 운동을 흔히 ‘인문주의’라고 말하는데 이는 인간의 존재를 중요시하면서 인간의 능력과 성품, 그리고 행복을 귀중하게 생각하는 정신을 말한다. 


특히 중세 이후에는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신(神) 중심의 세계관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문화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 회복과 문화적 교양 확산을 위해 노력한 사조를 지칭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인문주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배경으로 하면서 인류문명의 발전에 기여해 왔다. 특히 그리스 문명은 서양에서 인류 문명의 기원을 찾는 노력을 기울일 때 아무런 저항 없이 늘 맨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서양이라는 광활한 토양 위에 그리스 문명은 곳곳에 뿌려진 씨앗이었다. 그 대지 위에서 그리스 문명이라는 잔잔한 비를 맞지 않고 성장한 나무는 많지 않았다. 


현자인 소크라테스(Socrates)와 그의 제자 플라톤(Plato), 그리고 그를 잇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사람들을 위해 진리를 찾아내고 설파하는 삶을 살았다. 헤로도토스(Herodotos)와 투키디데스(Thukydides)는 역사 연구를 발전시켰고, 호메로스(Homeros)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에서 문학을 등장시켰다. 페리클레스(Pericles)는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는 기틀을 놓은 정치인으로 사명을 다했다.





그 외에도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수학에서,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는 의학 분야에서 자신의 명성을 드러냈다. 이들 외에도 수많은 그리스 철학자, 시인, 극작가 등의 작품들은 서양 문화를 위대하고 수준 높게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인물뿐만이 아니라 파르테논 신전, 아크로폴리스, 디오니소스 극장, 아고라 광장, 신타그마 광장, 리케이온, 제우스 신전, 올림픽 경기장 등이 대표하는 다양한 그리스 문물과 문화 유적은 시대를 초월해서 인류문명의 보고로 평가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이들 그리스 문명이 뿌린 씨앗은 로마문명의 맹아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으며 우리는 이를 그리스-로마 문명이라고 부르면서 고대 인류문화의 생성과 발전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되었다.


18세기 중반에 시작된 산업혁명이 촉발한 인류문명은 19세기를 거쳐 기계와 철도, 그리고 산업부문에서 급속한 발전을 거듭했다. 


그런 가운데 20세기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문물의 발전이 문명의 가치를 넘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서양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지식인과 높은 교양을 쌓은 사람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모두 자연스럽게 구사하면서 고대문명과 문화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공유되었고 이에 대한 반발은 설자리를 잃었던 것이 사실이다.





아테네로 들어가는 길은 어두웠다. 

2015년에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고대 민주주의의 요람으로 불리던 ‘신화(神話 속 신(神)들의 나라’는 쇠퇴를 거듭했다. 저녁시간임에도 거리의 가로등은 꺼진 것이 많아 어두웠고 시내 중심가나 골목의 상점들도 일찍이 셔터를 내렸거나 불을 꺼버리고 가게 문을 닫은 곳이 즐비했다.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며 표를 구걸하던 정치인들로 인해 나라의 곳간은 마침내 비어버렸고, 받는 것에 익숙해진 시민들은 정부가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시위에 나섰다. 


고대 철학자들의 도시에서는 더 이상 플라톤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고, 고대 올림픽을 개최했던 경기장 주변도 쇠락의 흔적을 견디지 못하고 고요했다. 그리스는 고대 인류문명을 이끌던 로마는 물론 다른 유럽 국가의 위상에 미치지 못하는 3류 국가로 전락해 버린 모습이었다. 


실제로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의 절반가량이 직업을 구하지 못하는 형편이 되었고 가정을 책임져야 할 가장의 실업률도 젊은이들 못지않았다. 이들은 오래전 철학자들이 사색하며 걷던 거리를 일자리를 찾아 방황하고 있었다.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비참해질 거라는 생각은 ‘비극’의 시작이 된다. 

언제인가부터 자신의 위대한 선조들이 만들어 놓은 고귀한 문명을 주변 국가들이 자신들의 것으로 대체하면서 과거 영광을 뒤엎을 수 있다는 우려를 사람들이 느끼기 시작한 시점부터 그리스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 아닐까. 아테네의 영욕을 목격하게 된 후 어두운 거리를 스치며 지나가던 그리스 사람들의 우울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산토리니 가는 먼 바닷길은 그런 심경 속에서 출발했다.

아테네의 피레우스(Piraeus) 항구를 떠난 배는 비바람을 뚫고 바닷길 8시간을 헤쳐 나갔다. 


아테네와 산토리니 섬을 수없이 오갔을 커다란 배는 풍랑에 심하게 흔들렸다가도 마치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이 다시 고요해진 바다를 당당하게 헤쳐 나갔다. 이른 아침 아테네 항구의 안개를 뒤로 하고 출발한 배는 마침내 해가 기웃하는 오후가 돼서야 깎아지른 절벽 아래에 위치한 항구에 닻을 내렸다.





태어나 한번이라도 에게 해()를 여행할 수 있었던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말한 적이 있다. 


에게 해는 그리스 섬들 모두를 갖고 있었다. 약 400여 개의 크고 작은 섬들을 오랫동안 에게 해는 품고 있었다. 신화와 역사의 섬 델로스, 신화 속 제우스와 기간테스가 싸움을 벌인 미코노스 섬,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이자 문화적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크레타 섬, 바다의 요충지였던 시로스 섬, 그 외에도 파로스 섬, 낙소스 섬, 티노스 섬. 그토록 많은 섬들을 오가느라 그리스에서 일찍이 해운업이 발전했는지 모른다.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저격으로 사망한 후에 미망인이 된 재클린이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혼했다는 오래전 신문기사가 생각이 났다. 





많은 섬 중에서도 산토리니는 ‘에게 해의 진주’라고 부른다. 산토리니 섬의 크기는 90.69km, 울릉도의 1.2배 넓이쯤이 된다고 한다. 인구는 채 2,000명이 되지 않지만 전 세계에서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섬주민의 수백, 아니 수천 배는 능히 될 것이다. 


산토리니에는 300개가 넘는 교회가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농장 안에 작은 교회를 지어 놓곤 하는데 각자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그러나 수시로 풍랑을 헤치며 섬을 오가는 척박한 환경 속에 살아야 하는 현실에서 자신들의 절박한 운명을 신에게 의탁하려는 속내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섬을 상징적 이미지로 수놓은 흰색 건물과 파란색 지붕의 수많은 집들, 높은 절벽과 바닷가를 따라 급경사의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 길, 나귀에게 먼저 길을 내줘야 할 것 같은 마을의 좁은 언덕길, 새파란 하늘과 끝없는 지평선을 멀리 바라보며 커피 한잔을 앞에 놓고 생각에 잠기게 하는 소박하고 예쁘장한 카페.


에게 해 햇볕에 갈색으로 그은 피부를 가진 조르바를 닮은 호탕 하지만 다정한 품성을 지닌 카페 주인, 그리고 절벽에 앉아 고요하지만 가슴을 쿵쾅거리게 하는 일몰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찾아오는 산토리니. 사람들은 에게 해가 섬을 품은 것처럼 각자 마음속에 산토리니를 품고 떠난다.








그리스 반도를 남북으로 오가며 기억에 남는 곳이 있었다. 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수도 아테네에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중요한 일을 놓고 신의 뜻을 물으며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고 있던 신전이 있던 델피(고대 그리스에서는 델포이, delphoi라고 불렀다)를 지나 버스로 약 7시간가량을 달렸나 보다. 마침내  눈앞에 나타난 메테오라(Meteora)라는 지역이 그곳이다.


오래전 수도를 위해 신의 섭리와 진리를 추종하는 수도승들과 은둔자들이 머물던 곳이다. 그들은 스스로 고립된 공간을 찾았고 바위산 높은 꼭대기에 수도원을 짓고 그곳에서 신과 대화하기를 갈구했다. 그들은 일반인들의 접근을 사실상 차단하고 그들만의 원시적인 신앙적 삶을 추구했다. 사람들이 찾으면 그들은 더 깊고 높은 곳으로 숨어들었다. 


깊은 바위산 꼭대기로 올라간 수도승과 은둔자들은 인간의 삶에서 드러나기 마련인 고뇌와 고통을 극복할 진리의 본질을 신과의 대화를 통해 깨닫기 위해 절대자와는 다른 짧은 삶을 헌신했다. 그들의 노력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답을 구하기 위해 고민하던 것과 맥을 이으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인지 모른다. 


그리스를 찾는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오래전부터 계승되어 온 진리 탐구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이런 욕망과 열정을 사랑하는 마음이 바닥에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날 역사, 철학, 문학, 미술, 건축 등 여러 영역에서 우리가 고전으로 인식하는 작품들 대다수가 고대 그리스 문화의 유산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뿐만 아니라 그리스 문명의 부침을 거듭하며 쇠퇴에 이르는 과정도 어려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지혜와 교훈을 준다. 


그리스가 뿌려놓은 고대문화의 씨앗은 로마에 의해 틀이 잡히고 융성해졌다. 이후 로마는 제국을 이루면서 오늘날 중부와 남부 유럽의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 포르투갈,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남부 독일, 바다 건너 잉글랜드와 웨일스. 동부와 남부지역의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그리스, 헝가리, 지중해 섬들, 아프리카의 모로코, 알제리 북부, 튀니지, 이집트, 중동의 리비아, 터키, 시리아, 이스라엘, 레바논, 요르단, 이라크와 이란의 일부, 그리고 러시아 일부 등 광활한 영토를 로마제국의 영역으로 만들었다. 


이들 지역에 로마문명이 뿌리를 내리게 되는데 그 바탕에 그리스 문화가 자리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인문학에 대한 연구가 다시 제기되고 있다. 산업혁명이 가져온 물질주의에 대한 환상이 사라지고 숨 가쁘게 시대의 변화를 쫓아야 하는 현실이 사람들을 지치고 힘들게 만든 원인이 바탕에 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이 쇠퇴하고 교황이 권력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부터 몰락하는 시기를 흔히 중세시대라고 역사가들은 구분한다. 역설적이게도 중세 암흑시대를 밀어내고 오늘날 우리의 일상과 가장 밀접한 근대와 현대를 만들어 낸 사람들이 삶의 모범으로 추종한 문명은 다름 아닌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이었다. 


오래전 쇠멸한 이들 고대문명이 오늘날 우리의 정신적, 문화적 뿌리라는 인식이 여전히 현대인의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다. 역사가 주는 교훈은 그런 것인가 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생필품 가격과 기름 값이 치솟고 미국과 중국 간 대립으로 안보는 물론 경제적 위기도 어느새 옆에 바짝 다가와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지나치게 환한 우리의 밤거리 가로등이 가끔씩 거부감을 느끼게 하지만 그래도 아테네 거리만큼 어두워지지 않기를 바란다. 


인류문명을 환히 밝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못지않은 우리 역사의 현인들이 제대로 평가받지도 못하고 명멸되어 버린 이 땅에 불빛마저 사그라져 버린다면 우리를 밝혀줄 등불을 어디서 찾아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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