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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 아저씨 Aug 23. 2023

내 마음속의 기억 산책. (1)

나의 살던 고향과 뿌리 찾기


무엇 때문이었을까?

문득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났다.

초등학교 2학년 때쯤으로 기억하고 있으니 거의 5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작고하신 이후 아버지에 대해서는 거의 잊고 지냈다.

3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와 함께 지금까지 가족들과 삶의 풍파를 헤치며 살아왔다.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들이 누가 확인해 줄 수 있을 만큼 뚜렷한 것은 없다.

시간이 좀 더 지나고 나면 그나마 간직한 기억들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기 전에 귀동냥으로 들었던 것들을 확인하고 싶지만 오래전 일들이라 알고 계신 분들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형님께 전화를 했다.

가장 기본인 아버지 출생과 사망연도에 대해 여쭤봤지만 당연히 형님도 알지 못했다.

단지 서류에서 얼핏 본 적이 있을 뿐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아버지의 이력을 알아보기 위해 사무실 근처에 있는 주민센터 민원실을 찾아갔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년월일, 사망일자를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해방 이후 일본에서 돌아오셨다는데 언제 나가시고 언제 들어오셨는지? 에 관한 자료가 있을까요?

어머니도 해방 이후 일본에서 오셨으니 입, 출국 연도를 알 수 있으면 하는데요."


조금은 황당한 의뢰에 담당 공무원의 얼굴에 당혹감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후 시간이라 나 말고 민원인이 없었다.

담당자 한분이 요청한 사항들을 확인할 수 있는 서류를 찾아보겠다고 했지만 본인도 확신하진 못하는 듯했다.

10분 정도 컴퓨터로 여러 서류를 열람하며 자꾸

고개만 갸우뚱했다.

급기야 선임인듯한 공무원에게 다시 SOS를 날렸다.

공무원 두 분이 마침내 머리를 맞대어 가며 거의 반시간을 부모님의 이력 찾기에 몰두했다.

감사한 마음이 절로 솟아 나왔다.


그 결과 아버지의 제적등본, 주민등록표 원부, 어머니의 기본증명서등의 서류발급을 통해 최소한의 이력이나마 접할 수 있었다.



 가족관계


할아버지, 할머니.


1908년에 혼인을 하셨으니 두 분은 조선시대에 태어나셨음이 확실하다.

할아버지는 1954년, 할머니는 1967년에 사망.

태어나신 해는 알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내가 살던 집 개울 건너 작은 아버지댁에 기거를 하신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된다.

그 당시 네 살로 어리기도 했지만 손주인 나를 살갑게 대한 기억이 없어 사실 친할머니인 줄도 몰랐다.


아버지.(밀양 박 씨)


1912년 2월에 태어나 1974년 1월에 돌아가셨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친 겨울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신 걸로 난 늘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풍으로 2,3년 동안 바깥 거동을 못 하시고 방에 누워 계셨던 걸 감안하면 내 기억이 그다지 틀린 건 아니었다.

1935년에 큰 어머니와 처음 혼인을 하시고 아들 셋을 낳았다.

이복형님 3분.

나이 많은 형님들이 계셔서 의아해했었는데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서야 이복형님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1949년에 큰 어머니 사망 후,

1952년에 어머니와 재혼하신 것으로 추정된다.(혼인신고는 56년으로 되어 있으나 어머니 슬하 첫아들인 형님이 54년 출생임을 감안)

어머니 슬하에 2남 2녀를 두셨고 아버지 연세 52세인 1963년에 막내인 나를 으셨다.

그때 어머니 나이는 36살이었다.

일제 강점기동안이나 해방 이후 언제 일본에서 귀국했는지의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복형님 중 셋째인 막내 형이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에서 1945년 1월에 출생한 것으로 보아 해방을 전후하여 일본에서 생활하셨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농사꾼이었지만 그  이전에는 장사나 정비 관련 일을 했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논, 밭과 더불어 시내에 상가도 조금 갖고 계셨다.

몸으로 일꾼 재산 탓인지 아버지는 자식들 교육에 굉장히 인색하신 분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머니.(달성 서 씨)


1928년 7월에 태어나 2020년 7월에 돌아가셨다.

가까이 살던 어른들의 입을 빌리자면  어머니는 일본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왔다고 했다.

학교에서 공부는 물론 운동까지 잘하는 여장부였다고 하셨다.

그래서 일본 학생들도 어머니를 무시하지 못했다고 한다.

어머니도 아버지처럼 해방 이후 국내로 들어오셨다고 하는데 이력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일본에서 교육을  받은 까닭에 어머니는 한글을 모르셨다.

1952년경에 아버지와 결혼을 한 이후 동사무소에서 실시한 한글 문맹자 교육을 받으셨다고 다.

그런데 계획된 과정을 다 배우기도 전에 어머니는 조기 졸업을 했다고 하셨다.

문맹자가 많았는지 기본적인 읽고 쓰기만 하면 교육에 더 이상 나오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읽기는 문제없었지만 어머니의 글쓰기는 소리 나는 대로 쓰는 것이었다.

혼자서도 잘할 수 있었겠지만 먹고살기에 바빠 언강생심 더 이상 한글공부는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 우리 형제, 누나들도 나이를 먹고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어머니는 한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크셨다.

"그때 끝까지 제대로 배웠으면 글을 잘  썼을 텐데!" 하며 늘 아쉽다는 말씀을 하셨다.

결혼 후 어머니 슬하에 막내인 나를 포함해 2남 2녀를 두셨다.

교육에 인색하셨던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자식교육에 남다른 열정을 갖고 계셨다.

이복형님들은 아버지의 교육에 대한 인색함으로 초등학교 졸업도 간신히 다고 한다.

어머니는 한 홉의 쌀을 아껴가며 아버지 몰래 장독대에 숨겨 두었다가 형과 누나들의 입학금과 등록금을 몰래 마련했었다고  했다.

60, 70년대 당시만 해도 학교에 내는 육성회비도 제때 내기가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우리 형제들은 육성회비를 늘 기한 내에 낼 수 있었다.



형 그리고 누나.


이미 말했지만 큰 어머니 슬하에 이복형님 세분이 계셨다.

나이 차가 많이  큰 형님의 조카 셋은 모두 나이가 나보다 많았다.

그렇지만 족보를 어찌 거스를 수 있었겠는가?

아버지뻘 되는 사람을 형이라 부르며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저절로 실소가 나오기도 한다.

세 분 모두  지금은 돌아가신 지 꽤 오래되었다.

그리고 어머니 슬하에 형, 누나 둘 그리고 나 2남 2녀를 두셨다.

1954년 형을 시작으로 삼 년 터울로 사 남매가 태어났다.

사 남매 모두 아직까지 건강한 삶을 유지하며 화목하게 살고 있다.

막내인 내가 올해 10월에 환갑이니 이젠 누가 이승을 먼저 떠날지 알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그나마 직계 가족들의 이력은 최소한이나마 정리가 된  듯해 마음 한편으로는 뿌듯한 마음이 든다.


다음은 태어나서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을 한번 살펴봐야겠다.




◇ 우리  집


기억을 더듬어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집을 그려봤다.



명문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건설업에 몸 담은 경력이 오래지만 역시 그림솜씨는 아직도 형편이 없다.

가족들이 태어난 주소를 살펴본 결과 1954 ~ 5년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이 된다.

아버지와 같이 손수 그 집을 지으셨다고 어머니는 자주 말씀을 하셨다.

 그런  걸로 보아 두 분이 결혼 이후 바로 집을 짓기 시작하셨던 것 같다.


1991년 내가 결혼하고 일 년 후 현재 형님 내외가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지어서 산지 거의 36년 만에 이사를 했고 그곳에는 현재 모텔이 들어서 있다.


가운데 있는 모텔이 옛날 우리집 터


집 앞을 흐르던 개천은 콘크리트로 복개되어 도로가 되었다.

어릴 적 그토록 넓게 느껴졌던 집과 마당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지금 보면 좁아 보인다.

그 당시만 해도 안동시내에 우리 집처럼 마당이 넓은 한옥집이 흔치 않았다.

농사를 지을 때는 추수하고 나서 보리타작을 집 앞마당에서 할 때도 있었다.

가을이면 마당에서 콩이나 깨를 말리고 도리깨질로  깨털이를 직접 하기도 했다.

대문 앞에 큰 나무가 한그루, 뒷마당에는 감나무가 또 한그루 있었다.

아버님이 장손이라 많은 제사와 친, 인척들로 늘 집안은 북적거렸다.

큰 마당과 대청마루 그리고 툇마루가 있어 하회 류 씨  종손 가문의 아들, 딸들이 우리 집 방 1에서 오랫동안 사글세를 살았다.

그 인연으로 수십 년을 양가가 친척처럼 오가며 안부를 전하며 살았다.

어머니가 바쁘다 보니 하회 류 씨 누나들이 나를 업어서 다 키웠다는 우스갯소리도 많았다.

방 2에는 극장의 영사기를 돌리는 아저씨내외가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고 고향에서는 가장 큰 영화관이었다.

인기 있는 영화가 상영되면 아저씨의 으로 어머니는 가끔씩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영화관람은 어쩌면 그 당시 어머니의 유일한 낙이자 호사거리였을 것이다.

덕분에 나도 시네마키드가 될 수 있었다.

집 옆에는 넓은 벽돌공장터가 있어 늘 우리 집과 함께 온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모든 종목의 운동 경기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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