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새벽에 자다 깨다를 몇 번 했더니 컨디션이 별로다. 냉장고를 열었다. 몇 개월 동안 냉장고 앞 첫째 칸을 차지하고 있는 타트체리 병이 보인다. 오늘따라 그 병이 더 눈에 거슬린다. 그때 엄마가 주방에 들어왔다.나는 짜증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엄마에게 말한다.
- 엄마. 이거 몇 개월 동안 냉장고에자리만 차지하고 있는데, 이제 먹지도 못할 거 같으니까 좀 버리자.
- 왜? 이거 뭔데?
- 엄마가 예전에 몸에 좋다고 사달라고 한 건데, 먹지도 않고 계속 냉장고만 차지하고 있잖아. 너무 오래돼서 먹으면 안 될 거 같아. 버려야겠어.
- 놔둬라. 아직 괜찮은 거 같은데... 내가 먹을게. 내가 먹으면 된다!!
상했을지도 모르는 병을 감싸 안으며 버리지 말라는 엄마의 행동에 갑자기 성질이 확 올라온다. 나는 엄마에게서 병을 확 뺐았다. 상한 거 먹어서 탈 나는 게 더 큰 일인데 왜 그렇게 자꾸 안 버리고 놔두려고 하느냐. 안 먹는 건 제발 좀 버리자. 왜 냉장고 비좁게 자꾸 쌓아두는 거냐고 버럭 소리치며 병 속에 남은 액체를 싱크대에 부어버렸다. 일요일 아침부터 짜증과 성질을 부리는 내 행동에 엄마는 당황했다. 엄마는 "아까워서 그러지.. "라는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엄마는 평소 음식을 잘 안 버린다. 먹다 남은 반찬도 당신이 먹겠다며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다 남은 포장음식도 아깝다고 냉장고에 보관한다. 한번 들어간 음식은 1주, 2주. 가끔은 한 달이 지나도 냉장고에 그대로 있는 경우가 많다. 보다 못한 내가 엄마 없을 때 쓰레기통에 다 갖다 버린다. 엄마는 넣어둔 음식이 있었는지, 그것이 없어진 지도 모르는듯하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음식이 남으면 나는 제발 좀 버리라고 하고, 엄마는 음식 그렇게 쉽게 버리는 거 아니라고 하며 내 잔소리에도 꾸역꾸역 냉장고에 쌓아둔다.
살림을 대부분 엄마가 하기에 신경을 안 쓰다가도 주말에 한 번씩 냉장고를 보면 짜증이 올라온다.
그런데 오늘은 그냥 내 기분이 안 좋아서 옆에 있는 엄마에게 신경질을 냈다. 사춘기 여고생도 아니면서 나이 70 인 엄마에게 주말 오전부터 성질부리는 중년의 딸이라니.
평일 아침에출근하는 내 기분을 살피고 눈치 보는 엄마 얼굴이 문득 떠오르며 죄책감이 밀려온다. 나는 아직도 성질 못된 딸이다.
생계를 위해 평생 온갖 험한 일을 한 우리 엄마다. 우리 딸 7개월이었을 때 낯선 서울에 올라와 손녀 키우며 살림해주시며 같이 지내신 게 벌써 16년이다. 엄마 덕분에 아이걱정 없이 직장 생활할 수 있었다. 아이도 할머니 덕분에 바르게 잘 자라고 있다. 그럼에도 47살 철딱서니 없는 딸은 나이 70인 친정엄마에게 괜한 신경질을 부린다. 못났다.
같이 살면서 엄마에게 얼굴 보며 미안하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잘 못했다. 가끔 카톡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문자로 대신할 뿐이다.
늦기 전에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말과 애정을 표현하는 딸이 돼 봐야겠다. 살갑지 않고 애교 없는 성격에 사실 자신이 없다. 그래도 노력해야지. 엄마를 위해서. 아니, 언젠가 지금을 후회하며 우는 내가 되지 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