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의 명복을 빌며...
작년 추석 이후로 글을 쓰지 못했다.
뭐랄까...
머리도, 마음도 퓨즈가 나가듯 단번에 꺼져버린 느낌이었달까...
내 안을 채우고 있던 어떠한 것이 갑자기 다 쏟아져 나와서 다시 담으래야 담을 수 없었다고 해야 할까...
나의 상태를 정확하게 글로 표현할 수 없어서 모니터 앞에 앉았다가도 바로 창을 닫기 일쑤였다.
왜 글을 쓸 수 없을까...
왜 이렇게 공허할까...
한동안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제자리에 박혀 버리다 못해 땅 밑으로 꺼지는 듯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쏟아내고 표현해야 할 감정이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을.
혼자 조용히, 속으로 삭히는 애도의 시간뿐만 아니라 밖으로 드러내고 스스로 대면해야 할 마음도 있었는데 나의 무의식이 계속 현실을 부정하고 회피하느라 제대로 밖으로 꺼내보이지를 못했다.
상실의 아픔을 회피하는데 급급해서 어리석게도 그분께 진정으로 편히 떠나시라고 빌어드리지도 못했다.
이 작업은 나에게 꼭 필요한 작업이다.
디젤집시 님을 갑작스레 떠나보내며 커다란 구멍이 나버린 나의 마음을 아주 찬찬히, 깊게 들여다봐줘야 한다.
작년 가을, 추석이 코앞이라 정신없이 집 정리를 하고 있었다. 잠시 쉬는 틈에 구독 중인 유튜브 채널에 새로 올라온 영상이 있나 싶어서 휴대폰으로 접속을 했다.
새로운 영상은 없었으나 커뮤니티에 새 글이 올라와있었다. 혹시 라이브 방송 공지 소식인가 싶어서 얼른 글을 열었다.
그런데 나의 기대와는 달리 그 글에는 이렇다 할 설명 한 줄 없이 사진 한 장만 올라와있었다.
하얀 국화꽃에 둘러싸인 디젤집시 님의 사진.
...이게 뭐지?
...오늘 만우절인가?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채널이 해킹당했나??
신체의 모든 기능이 일순 멈춘 듯했다. 내가 대체 지금 뭘 보고 있는 건지 제대로 인지할 수가 없었다.
댓글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났다.
댓글에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글을 확인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
하지만 계속 넋 놓고 있을 수도 없었기에 불안한 마음으로 화면을 내렸다.
이미 수백 개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모두가 믿기지 않았기에 망연자실해있었다.
최대한 집중해서, 어쩌면 지금 내가 어떤 트릭에 걸려들어서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심정으로 하나하나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사인은 급성심근경색.
디젤집시 님의 부고 소식은 사실이었다.
그는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세상에 눈 뜨면서 순탄치만은 않은 삶을 살았다.
한 곳에만 정착하며 살 운명은 아니었는지 파푸아 뉴기니에서도 사업을 했었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사업을 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 쓰디쓴 실패를 맛보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후유증으로 우측 안면근육 마비가 생기면서 사람들은 날 선 시선과 말로 그의 마음에 생채기를 더했다.
사람들의 무자비한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가방 하나 덜렁 싸서 2006년에 무작정 캐나다로 떠났다.
캐나다에 도착하자마자 구인구직 신문을 뒤적이며 구한 첫 직업이 트럭커였고 그의 평생 업이 되었다.
그리고 북미대륙을 횡단하는 트라이앵글 트럭커라는 직업을 통해 그는 10만이 넘는 벗님들 (채널 구독자 애칭)과 소통하게 되었다.
한 번 트립을 떠나면 최소 보름 일정으로 눈이 오든, 비바람이 몰아치든 운행 일정에 맞춰서 험한 록키 산맥 길을 마다하지 않고 운전하였다. 꼬박 보름 동안 트럭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휴게소 샤워장에서 씻으며 매번 약 12,000km를 달린다는 것은 나로선 쉬이 상상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매년 25만 km를 달린다니...
심지어 2020년에는 코로나 19로 인해 씻고 먹는 것에 제약이 생기면서 더욱 고된 운행 길을 소화해야 했다.
그는 힘든 상황 속에 있는 시민들을 위해 먹거리를 실은 트럭이 멈춰 선 안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캐나다와 미국을 더욱 열심히 오갔다.
그가 처음 유튜브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길 위에서 홀로 이겨내야 하는 지독한 외로움 때문이었다.
그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자신의 일상뿐만 아니라, 외로움 또한 가감 없이 드러내며 진솔하게 자신의 삶을 벗들과 나누었다.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그의 일상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큰 위로를 받았다.
초창기에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고, 목소리 또한 나오지 않았다. 트럭 앞유리에 달린 카메라로 드넓은 북미대륙 길만 비추고 자막으로 설명을 대체하였으나 회를 거듭하면서 목소리도 나오고 채널이 커지면서 KBS 다큐도 찍게 되고 자연스레 얼굴도 공개하게 되었다.
디젤집시 님은 나에게 어떤 존재였던 걸까...
인생선배.
참 어른.
한 단어로 정의 내리기엔 나의 마음이 온전히 담기지 않을 만큼 나에게 있어선 큰 존재이다.
참된 어른을 만나기 힘든 요즘 세상에서 그를 알게 된 것은 나에게 큰 행운이자 위로였다.
별별 인생 풍파를 두루 겪어봤다며 으스대고, 큰 어른인 척하는 나이만 먹은, 그렇고 그런 어른이 아니었다.
자신이 겪은 인생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담담히 들려주며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지 그 방향성에 대해서 자신이 깨달은 깊은 통찰을 무겁지 않게 들려주었다.
어떤 식으로 살라는 폭력적인 강요 없이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값진 경험들을 공유하고 어떤 자세와 시각으로 인생을 사는 게 좋은지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불평불만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그가 전해주는 메시지를 통해서 다시금 인생에 대해 환기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언제나 유머를 잃지 않고, 감사를 잊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본받고 싶었다.
결국...
인생무상인 걸까...
짧은 글 몇 줄로 요약하기엔 너무나 굴곡진 인생을 살다가 이제 조금 평안한 삶에 이르렀다 생각한 시점에 갑작스레 떠나버렸다.
4년 만에 받은 두 달간의 휴가로 한국에 돌아와 지내면서 사랑하는 형제를 만나고, 보고팠던 사람들을 두루 만나며 이제 캐나다로 다시 떠날 일정만 남아있었는데...
추석 연휴가 그의 발인일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차라리 고향에 오지 않고 캐나다에 머물러 있었다면 어땠을까...
본디 준비된 이별이란 없겠지만 갑작스레 진심으로 마음을 나누던 사람을 영영 떠나보낸다는 것은 정말 가혹한 일이다.
별별 원망이 다 들지만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쓰지 않고서는 앞으로 쓰게 될 글들에 나의 진실된 마음이 담겼다고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완벽히 정리된 마음도, 글도 아니지만 이렇게나마 고인이 되신 디젤집시 님의 명복을 빌어본다.
한동안 그의 유튜브 채널에 들어갈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영상을 보며 그리워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보려 한다.
먹먹한 가슴이 언젠가는 조금만 더 편안해지길 바라며...
오늘도 나는 그가 남긴 영상을 통해 염치없게도 위로받는다.
정말 많이 그립습니다, 디젤집시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