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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소나 Aug 28. 2020

누구를 위하여 큐브를 얼리나

라면도 못 끓이면서 이유식을 만들어 먹이겠다고

나는 요리똥손이다. 열 살 즈음에 동생은 내가 해준 저녁을 먹고 응급실에 실려갔다. 그 뒤로 남동생은 자기 손으로 뭔가를 해 먹는데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장성하여 제 손으로 갈비찜도 해 먹는 스물아홉 총각이 되었다. 과연 나는 내 아들에게 건강하고 맛있는 이유식을 해 먹일 것인가 아니면 훌륭한 집쿡요리사가 한 명 더 늘어날 것인가.



 우선 책을 두 권 샀다.

전공공부도 이렇게 안했지

 국민학교 사람은 뭘 시작할 때 책이 있으면 마음이 든든하다. 별 고민 없이 제일 많이 팔린 책을 샀는데, 튼실한 두께와 허튼 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구성을 보고 '내가 뭔가 실수를 한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흡사 전공책을 방불케 하는 그 책을 나는 정말 전공책처럼 인덱스와 밑줄을 그어가며 사용하게 된다) 슬픈 예감은 틀린 법이 없지




 이유식 준비는 제2의 혼수라더니

 보통 좋아하는 아이돌에게 '통장으로 키우는 내 자식'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내 자식이야 말로 진짜 통장으로 키우더라.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아이템들 나름 열심히 비교하고 뺄 건 뺐는데도 불구하고 정말 신혼집 꾸밀 때만큼 택배가 왔다.

1차택배 개봉

고작 80ml 쌀미음 하나 만드는데 뭐가 이렇게 많이 필요한지 또 시간은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지. 밤새 불려놓은 쌀로 죽을 만드는 것 까지는 OK. 그걸 채에 걸러야 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별생각 없이 책에서 하라는 대로 '해보지 뭐'하고 시작했는데 240ml 쌀죽을 채에 내리는데 한 시간이 걸렸다.

인간맷돌이 갈아낸 초기이유식
고작 쌀미음하나 해놓고 설거지는 잔뜩

  스타벅스 톨 사이즈가 355ml니까 평소에 호로록 마시는 커피 2/3 정도의 이유식을 만드는데 꼬박 한 시간을 서서 인간맷돌이 되어 있던 것이다.   

 그 한 시간 동안 남편은 애앵애앵 우는 아이를 홀로 봐야 했고, 아이는 아이대로 엄마가 없어졌다는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때 처음 그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누굴 위해서 이걸 만들고 있는 거지?




너도 별 수 없어. 엄마 되면 다 똑같아.

  장난감 가지고 혼자노는 아이 곁에서 무릎 하나를 세우고 앉아 완두콩을 까고 있었다. 얼른 까서 삶아서 큐브를 만들어야 하니까. (완두콩알에 껍질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이유식 만들 때 그걸 까야 하는 줄은 더더욱 몰랐다)

완두콩

그런 나에게 엄마가 물었다. "엄마 되니까 바쁘지?" 그러고 보면 우리 엄마는 항상 바빴다. 저녁밥 먹고 다들 거실에 배 깔고 누워 테레비를 볼 때, 엄마는 항상 뭘 하고 있었지. 콩나물을 다듬는다거나, 멸치대가리는 뗀다거나. "원래 엄마들은 다 그런 거야"  엄마들은 그래서 그러고 있는 거라고 엄마가 말했다. 아, 이래서 그런 거였구나.



맘님들! 오늘은 이유식 데이입니다.

  '이유식 데이'라는 단어 아래 수백 가지의 수고가 삭제되어 있는 줄은 몰랐지. '재료를 손질하고 잘게 다지고 충분히 물러지게 삶고 그람수를 따져가며 나눠 담고 단단히 얼려서 랩으로 개별 포장해서 비닐팩에 넣어 냉동실에 보관하는 작업'을 '큐브 만들기'라고 간단하게 줄이면 고생한 내가 너무 서운하잖아. 귀엽고 러블리한 말로 내 노동을 퉁치는 것 같아 기분이 매우 언짢았다. 대부분의 살림이 그러하듯이.

요령없이 단호박을 조각하던 시절
위의 보기를 당근 단호박 고구마으로 구분하시오

 사실해놓으면 정말 편하긴 하다. 한 줄기의 시금치가 내 아들이 먹는 이유식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100이라면 큐브를 만드는 일이 80 정도 되는 것 같다. 일종의 핸드메이드 반조리 같은 느낌. 나중에는 큐브들끼리 조합해서 끓이기만 하면 되니까. (농도 조절, 입자 크기 조절, 아이에게 먹이기는 굳이 쓰지 않으려고 한다)


큐브의 위기. 닭고기

 개인적으로 이유식 큐브 난이도의 정점은 닭고기라고 생각한다. 는 주로 닭가슴살을 사용한다. 그나마 손질이 쉽다고 하는데도 600g 한 팩을 다듬는데 한 시간이 빠듯하다. 근막을 떼고 살점 사이사이에 숨어있는 힘줄과 핏줄을 제거하는 일이다. 손으로 닭의 살을 파헤쳐가며 핏줄을 찾고 있노라면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을 때가 있다. 유난히 까다로운 친구들을 만나면 나는 너희를 위해 동물복지 유정란도 사 먹는데 너희들은 왜 내 복지에 관심이 없느냐는 이상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제 탓을 하다 하다 제 살을 내어준 닭에게도 한풀이를 하고 있는 거다.

 그 날은 아이가 친정아빠 껌딱지가 된 날이었다. 하비의 넓고 높은 품이 좋았는지 좀처럼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할아버지는 손주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뻤지만 10kg인 아이를 안고 있자니 땀도 나고 허리도 아팠다. "아직 멀었냐?" 아빠는 은근히 재촉을 해왔고 나는 영혼 없이 "응 거의 다 돼가"라고 대답했다. 아이는 졸려왔지만 하비의 품은 벗어나기 싫었고, 잠과 싸우기를 택했다. 아빠는 품에서 바동거리며 칭얼대는 손주를 당해낼 기술이 별로 없었다. "더 해야 되냐? 애 졸린 거 같은데?" 기껏 손질해놓은 재료를 날려먹은 적이 몇 번 있어서 신경이 곤두서 있었는데, 아빠가 자꾸 재촉을 하니 나는 나대로 짜증이 났다. "아우 아빠가 재워, 왜 못 재워." 아빠는 친정엄마와 함께 아이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닭을 삶기 위해 냄비를 올렸다.

 닭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서야 아빠를 돌아봤는데, 등에 땀이 스며있었다. 집에 에어컨도 틀어놨고, 남부럽지 않은 여름옷을 입었는데도. "아이고, 우리 딸 새끼 먹인다고 애쓰네"

 자식을 키우면서도 왜 나는 부모 마음을 자주 까먹을까. 멍청한 걸까. 잘하지도 못하면서 이유식은 왜 만들어 먹인다고 여럿을 고생시킬까. 이 와중에 저 망할 놈의 닭고기는 아직 큐브가 되려면 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당탕탕 와르르 맨션이었지만 어느덧 후기 이유식에 접어들었다. 그 말은 삼시세끼 이유식을 먹는다는 뜻이다. 아침은 푸딩의 탈을 쓴 계란찜으로 시작하고 있다. 정석은 아니지만 생활패턴과 입맛에 잘 맞는 메뉴인 것 같다. 이 정도의 여유와 융통성이 생기기까지 얼마나 고단한 날들을 보냈던가.

 이유식을 만들어 먹이면서 음식이 조금 늘긴 했다. 초기에 비해 큐브를 만드는 시간이 많이 줄었고, 쓰는 그릇의 숫자도 확연히 적어졌다. 살림이 손에 익어가는 모양이다.


"애기가 이유식 먹고 나서 많이 컸어"


 클 때가 돼서 그만큼 큰 거겠지만 엄마의  한마디가 큰 위로가 되었다. 내가 잘 해서 아이가 잘 크고 있다는 말로 듣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누군가에게 나의 수고와 노력을 인정받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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