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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커피 방랑기

커피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끊지는 못 하겠습니다.

by 쏘냐 정

1. 나의 첫 커피머신은 돌체구스토였다. 어차피 커피맛은 모르는 사람. 그럼에도 커피머신이 필요했던 건 커피를 몰라 탈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손님이 올 때마다 커피를 제대로 내지 못해 송구했다. 그때 마트에서 돌체구스토를 만났다. 아메리카노보다 라떼를 좋아하는 내게 맞춤인 듯싶어 구매했다.

그러다가 코로나가 시작되었다. 손님초대할 일도 없어졌다. 자연스레 돌체구스토 머신은 창고로 들어갔다.

2. 코로나 5개월 차쯤 여행을 갔다. 집 밖에 나서는 것도 겁나던 시기라 답답하게 지내다가 집콕하는 공간이라도 바꿔보자며 공간이 큰 숙소를 잡아서 간 여행이었다. 그곳에 네스프레소 머신과 캡슐이 있었다. 여전히 커피맛은 모르지만, 네스프레소가 좋아 보였다. 가끔 나가면 마시는 커피맛과도 비슷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 다들 네스프레소가 훨씬 낫다고들 했다.

꼭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엄마로 살며 누리는 작은 사치가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였던 나는, 코로나에게 빼앗긴 사치를 되찾고 싶었다. 네스프레소 머신을 사기로 했다. 코로나가 곧 끝날 거라는 기대가 사라져 가고 있는 즈음이었다. 애엄마인 나는 아마 제일 마지막에 자유를 찾는 그룹이 되지 않을까. 커피머신이 자유를 잃은 나에게 위로가 될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머신을 사는 건 아까웠기에, 검색 끝에 직구로 저렴한 아이를 구매했다.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우유를 부으면 카페에서 마시던 것과 비슷한 맛이 났다. 그때부터 커피가 좋아졌다. 정확히는 커피가 연상시키는 집 밖의 느낌이 좋았다. 여전히 커피맛은 모르지만 우유에 커피 탄 맛은 안다.

3. 머신을 구매하고 1년쯤 지났을까. 얘가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제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검색으로 해결책을 알아내 고쳤다. 1년 반쯤이 지났을 땐 커피 한번 내리려면 두세 번씩 껐다켰다를 반복해야 했다. 버려야 되나 할 때마다 귀신같이 다시 멀쩡해져서 3년을 넘겼다. "우리 집 커피머신 또 고장 났어." 하면 이웃언니는 "너네 머신 얼마 전에 새로 사지 않았어?" 했다. "아니, 그때 진짜 고장 난 줄 알았는데 다시 되더라고. 그래서 아직 썼지. 근데 또 안 돼." 그러기를 여러 번. 2개월 전엔 아예 머신을 창고에 넣어버렸다. 커피를 끊겠다는 결심을 하고서.

그런데... 내가 자꾸 커피를 사러 나가는 것 아닌가. 한동안 여러 가지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그럴수록 더 그랬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어느 날, 네스프레소 앱에 접속하고 캡슐을 샀다. 그 캡슐이 도착한 후에 머신을 꺼냈다. 근데... 동작이 제대로 안 된다.. 검색으로 해결방법을 알아냈다. 물이 나오지 않는 문제도 해결했다. 근데, 버튼이 말을 듣지 않는다. 마음대로 깜빡거리고 버튼이 눌리지 않는 증상을 다양하게 경험했지만 이번 건 독특하다. 맘대로 깜빡거리는데 신기하게 룽고버튼은 작동을 한다. 그 외의 것은 되지 않으면서.. 문제는 늘 라떼만 마시는 내게 룽고버튼은 장식품에 불과하다는 것. 내게는 에스프레소가 필요하다.

진짜 새로 사야 하나 싶어 매장에 가서 살피고 왔는데 막상 사자니 너무 아깝다. 다시 검색하고 AS 전화도 해보고 무작정 머신을 붙잡고 이리저리 해보는 내게 남편이 핸드폰을 내밀면서 네스프레소 로그인을 해달란다.

4. 다음 날 아침, 남편의 말. "내가 어젯밤에 머신 주문했어." 그리고 오늘 새 머신이 도착했다. 직구머신보다 두 배는 비싸서 그 당시 밀어둔 시티즈 모델. 늘 라떼만 마시니 에어로치노 하나 사라는 말에도. "괜찮아. 나 그냥 차가운 우유 섞어 마시면 돼." 했었는데, 에어로치노 4도 함께 도착했다.

사실 이번에 매장 갔을 때 에어로치노 시연해 봤더니 너무 욕심나긴 하더라.. 그 와중에 어젯밤부터 열나는 둘째 데리고 병원 다녀와서는 열심히 머신을 설치하고 에어로치노를 닦았다. 그렇게 내린 라떼 한 잔. 오, 이거 진짜 카페에서 마시는 느낌이잖아. 같은 우유가 왜 이렇게 다르게 느껴지지? 신기한 커피의 세계. 음. 이건 우유의 세계인가.

여기까지가 24년 1월에 써놓은 이야기


5. 새 머신을 산 지 1년 반이 지났고, 그 사이 나는 커피를 끊겠다는 결심을 네댓 번은 했다. 마지막에는 위장이 너무 나빠져서 비장하게 정말 끊기로 했다. 하지만, 이미 잔뜩 사놓은 캡슐의 시간도 함께 지나가고 유통기한이 임박해져 버렸다. 어쩌지. 아깝잖아, 이거. 결국 엊그제부터 한잔씩 야금야금 다시 내려먹는 중이다. 1번에 썼듯이 나는 정말로 커피맛은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째서 끊지를 못 할까. 그것이 커피의 신비.


덧. 오랜만에 발견한 이 글을 흘려버리고 싶지 않아 업데이트하기로 했다. 나의 커피 방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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