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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Apr 14. 2024

투움바와 석화, 그리고 대구통닭

우리 식탁에 오르지 못할 음식들의 명단 (1)



*이 글은 다소 무분별한 남편 뒷담화가 될 수 있으니 읽기 전에 독자의 주의를 요합니다.


스파이시 투움바 ㅡ 사진 출처 : 아웃백 홈페이지

 임신했을 때 다행히 입덧이 별로 없었다. 주차장에서 매연을 맡거나 잘 쓰던 섬유 유연제 냄새에 헛구역질이 나는 정도로 스치듯 가벼운 입덧이 지나가자, 맹렬한 식욕이 찾아왔다. 남편의 신발과 옷을 사러 나갔던 어느 날이었다. 내가 임신했든 말았든 메뉴를 결정하는데 한세월이 걸리는 남편(언제나 최고의 메뉴를 선택하겠다는 일념으로 오래 고민하지만, 늘 비슷한 거 먹는 그런 사람)은 끝없이 고민했다. 남편 운동화를 고르고 나자, 밥집을 고르기 위해 나를 끌고 좁은 번화가를 계속 돌았다. 처음 내가 제안한 인도 카레나 파스타처럼 자주 먹지 않는 메뉴 거절당하자, 기분도 상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일단 배가 너무 고팠다.


 눈에 보이는 식당 어디든 들어가자고 했다. 버거킹도 좋고, 롯데리아도 좋다. 저기 보이는 분식집도 괜찮다. 아무리 말해도 남편은 갸웃거리기만 했다. 그렇게 주린 배를 움켜잡고 들어간 식당은 찜닭집이었다. 집에서도 툭하면 배달시켜 먹는 흔해빠진 메뉴, 찜닭 말이다. 메뉴판을 붙잡고 또 신중해지려는 남편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새우 찜닭! 그거 먹어!”

 찜닭은 잘 먹었다. 하지만 정말 특별히 맛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 정도 허기진 상태라면 무엇인들 맛이 없었겠나 싶을 뿐이었다. 맛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새우 까느라 번거로웠던 일, 공깃밥의 쌀 상태가 별로였던 건 정확히 떠오른다.


 찜닭을 먹고 커피도 못 마신 채, 남편의 점퍼를 고르러 갔다. 임신했다고 위해주는 건 개뿔도 없으면서, 커피는 절대 못 마시게 했다. 한 잔은 마셔도 된다는 상식에 따라 본인이 없을 때는 매일 마시는 커피인 줄도 모르는 남편의 점퍼 고르기 역시 나에게는 재미없었다. 나는 본래 옷 사러 안 나가는 사람인데 굳이 나를 끌고 나가서 고른 점퍼는 하필이면 매장에 재고가 없다고 했고, 남편은 또 굳이 그 옷을 다시 찾으러 간다고 했다.

 비가 슬슬 내리는 저녁이었다. 점퍼를 받고 나는 아웃백에 가자고 제안했다. 옷 가게와 아웃백은 걸어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복잡한 오거리를 사이에 둔 위치라 차를 빼서 다시 아웃백이 있는 건물에 가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20분 이상 걸리지는 않을 거였다.


 아웃백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심드렁하던 남편은 차를 타자마자 말했다. ‘아웃백 같은 곳 말고 좀 조용한 곳은 없냐?’이라고. 아까부터 배가 고팠지만, 또 화가 솟구쳤지만, 우겨서 가봤자 기분을 잡칠 것 같아 20분 거리에 있는 조용한 파스타집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주차장이 있냐는 질문에 욕이 나올 것 같았지만, 모처럼의 외식이니 또 참았다.

베스트 메뉴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뚫고 도착한 파스타집은 괜찮았다. 밝은 조명 아래 아늑한 분위기는 아웃백보다 좋았고 메뉴도 다양했다. 샐러드와 스테이크와 크림 파스타를 주문했고 음식은 평범하고 무난한 맛이었다. 우리는 말없이 조용히 밥을 먹었다. 나는 굳이 찾아올 만큼 훌륭하지 않은 음식 맛이 불만이었지만, 식당에서든 밥상에서든 차려진 음식에 트집을 잡지 않는 것이 내가 지키는 철칙이기에 조용히 있었다. 애초에 내가 먹고 싶었던 건 아웃백에 파는 투움바 파스타였기 때문에, 같은 메뉴가 없다는 사실은 분명히 인지하고 온 터였다. 산 아래에 있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오면 내 기분도 풀어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역시 나에게는 투움바 파스타가 필요한 거였다.


 설상가상으로 옆 테이블의 커플은 드라마처럼 다정했다. 들려오는 대화로 미루어 보아 신혼부부 같은 한 쌍은 요란스레 닭살을 떨지 않고, 서로에게 다정했다. 대화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으며 주제 또한 다양했다. 조용한 가게라 귀담아듣지 않아도 들리는 그들의 대화를 배경음 삼아 먹는 평범한 크림 파스타는 그저 그랬다. 스테이크는 맛있었지만, 샐러드에 뿌려진 싸구려 발사믹과 견과류가 거슬렸고, 임신한 아내가 원하는 투움바 파스타를 먹으러 가주지 않은 남편이 밥 먹는 모습은 꼴 보기 싫었다. 호르몬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울고 싶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는 않았지만, 엉엉 우는 심정으로 집에 돌아왔다. 산책을 하고 싶었지만, 비가 내린다는 핑계로 남편이 거절했고(비가 안 왔어도 거절할 사람이지만), 우울하다고 말하는 나에게 ‘어서 잠을 자라’라고 대답한 남편 이야기는 서른 번 정도 사람들에게 한 바가 있는 18년도 봄에 일어난 사건이다.


 얼마 전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남편이 물었다. “투움바 파스타가 뭐야? 맛있나?” 주방에 있던 나는 고무장갑을 벗어던지고 남편에게 달려갔다.

“야! 너는 죽을 때까지 투움바 파스타 맛 모를 거다!”

갑작스러운 공격성 대사에 당황한 남편이 입을 뗄 기회를 주지 않고 나는 쏘아붙였다.


“내가 임신했을 때 투움바 먹고 싶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가게 바로 앞에서, 도로 복잡하다고 니가 어떻게 했어! 괜히 먼 길 가서 별로인 파스타 먹게 했잖아! 니 옷 사러 나간 거고, 매장 바로 앞에 투움바 팔았는데! 니가 아웃백 싫다고 안 갔잖아! 배고파 죽겠는데, 임신한 아내와 먹고 싶다는 걸 굳이 굳이 거절했잖아! 그게 기억이 안 난다고? 안 나겠지. 뭔들 기억하겠니. 아무튼 투움바 파스타 먹다가 걸리면 끝장날 줄 알아!!”

어버버 입을 다물고 있던 남편이 차분하게 말했다.

“아니, 그게, 투움바가 뭐냐고. 무슨 맛이냐고….”

“크림 파스타인데, 매콤하고 면이 두툼하고…, 아니! 너는 알 거 없어! 너는 절대 먹을 일 없어! 알았어?”

나는 씩씩대며 안방에서 나왔다. 죄인이 어디서 감히 투움바 파스타를 입에 올리느냔 말이다.

 그때 이 사연을 들은 나보다 더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내준 사람은 동네 친구였다. 친구는 내 손을 잡고 아웃백에 가주었다. 배가 터지도록 먹자며 이것저것 주문했는데 기억나는 건 부시맨 브래드와 투움바 파스타뿐이다. 맛있게 먹고 있는 나에게 연신 ‘언니, 더 먹어요. 더 먹어.’ 해주던 친구는 통신사 할인과 카드 할인인가를 더 받아 알뜰하고 야무지게 아웃백을 사 먹게 도와주었다. 그렇게 투움바에 한이 풀린 나는 출산 때까지 다시 그 메뉴를 찾지 않았고, 갓난아이를 집에서 돌볼 때에 다시 찾아온 ‘투움바 먹고 싶어’ 시기에는 쿠팡에서 ‘이가자연면 투움바’를 배달시켜서 실컷 먹었다. 혹시 남편이 볼까 봐 싱크대 하부장 깊은 곳에 숨겨두고 혼자서 매번 끓여 먹었다. 맛난 음식을 좋아하는 남편이 그 맛을 영영 모르기를 바라면서, 아이가 낮잠 자는 시간에 휘리릭 끓여 먹던 이가자연면 투움바 파스타, 떠오른 김에 방금 주문했다. 이번에도 남편은 먹지 못하리. 투움바 파스타.


-덧

한 번에 다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한이 깊어 글이 길어진다. 석화와 대구 통닭은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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