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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Mar 27. 2024

아빠 이야기 2

자랑스러운 아빠, 그냥 아빠


2. 자랑스러운 아빠


 동네에 무슨 일이 있으면 사람들은 아빠를 찾아왔다. 아빠는 동네 어른들을 대신해 면사무소와 농협에 드나들며 문서 작성을 도왔다. 외지에서 귀농하는 사람들은 아빠에게 선물을 가지고 와서 인사했고, 새로 지은 집에 아빠를 초대하곤 했다. 아빠는 경로당과 마을 회관에서 열리는 수많은 회의들에 참석했고, 관공서에 찾아가 도로 공사와 밭둑 공사를 지원받았다. 화재로 불탄 옆 동네 이웃집을 위해 면 곳곳을 찾아다니며 모금 활동을 벌여 지역 신문에 나오기도 한 아빠는 언제나 마을을 대표하는 어른이었다.


 어릴 적에는 반장, 내가 자란 후에는 이장이었고, 결혼할 때에는 이장협회의 회장이었으니 꾸준히 사람들을 대표하는 역할을 해왔다. 칠순이 된 올해에도 무슨 협의회장을 맡고 있다고 하고 이런저런 모임이 끊이지 않는 걸 보면 아빠는 일평생 반장스러운 어떤 존재로 사는 것에 익숙한 게 틀림없다. 개인적인 이득을 전혀 챙기지 않는 청렴한 대표자라는 평판을 얻는 한편, 자기 실속은 하나도 못 챙기고 남 좋은 일만 하는 허울뿐인 회장이라는 날카로운 비판도 받고 있다. 엄마의 날카로운 비판은 나도 공감하는 바로, 시골집에 쌓여가는 무거운 상패를 볼 때마다 아빠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래서 또 이번에도 상금은 없지? 그런 상 받아서 뭐 하냐?” 장녀가 비웃든 말든 아빠에게 직함과 상패는 소중한 자랑거리이다.

 어릴 적에 나는 늘 아빠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동네에 있는 낡은 집들 가운데에서 유난히 더 낡은 우리 집과 친구네 집 사과밭을 부쳐서 농사짓는 형편 따위에 신경 쓰지 않던 시절이었다.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존경받는 어르신이었고, 아빠는 동네에서 가장 똑똑한 어른이었으며, 그런 아빠를 닮아 똘똘한 나는 자부심 강한 어린이였다. 뒤란 장독대 옆에는 동그랗고 무성한 회양목이 한 그루 있었는데 아무도 이름을 몰랐던 것인지 반장나무라고 불리고 있었다. 학교 화단에나 있는 정원수가 왜 거기에 자라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나이에도 자랑스럽게 여긴 동네 반장인 아빠, 교목인 느티나무처럼 반장 집인 우리 집을 대표하는 회양목의 작은 이파리에 반짝이던 초록빛을 보며 가슴이 뿌듯하던 감각이 남아있다. 아파트 단지와 동네 가로수로 흔하디 흔한 회양목을 매번 유심히 들여다보는 습관도 그때부터 이어져 온 것일지도 모른다.

 8년 전 여름 새벽녘쯤 사과밭에 나가 일하던 아빠가 독사에 손가락을 물렸다. 혼비백산한 엄마 대신 아빠가 직접 구급차를 불렀다고 한다. 그 와중에 오지랖 넓은 동네 목사의 의견에 따라 청송 병원에 갔다가 다시 영천에 있는 대학 병원으로 옮겨갔는데, 평소 독단적인 아빠는 꼭 이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해서 아내의 속을 뒤집는다. 어쨌든, 다행히 대학 병원 중환자실에서 링거를 맞으면서 옛날이었으면 죽었을 상황을 넘겼다. 중환자실에서 아빠는 여유로운 표정을 잃지 않아 자식들이 걱정을 덜었다. 입원 기간이 제법 길어서 일반 병실로 옮긴 후에 다시 문병할 때는 아빠 엄마가 바라는 대로 화장을 곱게 하고 예쁜 옷을 차려입었다. 사회성을 최대로 발휘해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하고, 달콤한 간식을 잔뜩 사서 병실 어른들이 나눠 먹을 수 있도록 했다.


 퇴원이 며칠 남지 않았을 때 아빠는 반드시 외출해야 한다고 의사를 설득했다. 아빠가 맡고 있는 협의회장의 임기 종료 행사에 꼭 참석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지지대와 고정끈으로 오른팔이 묶인 아빠는 나에게 운전을 부탁했다. 나는 새벽에 구미에서 출발해 아빠와 엄마를 태워 행사장에 갔다. 거대한 야유회장 같은 너른 솔밭에서 나는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인사를 하고, 아주머니들이 나눠주는 전과 떡을 얻어먹었다. 시골 행사 특유의 재미난 게임들(쌀가마니 짊어지기라든지)과 푸짐한 경품을 구경하고 아빠의 짧은 은퇴 연설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산만한 분위기 속에서 새 재킷을 차려입은 아빠가 단상에 올라 인사했다. 의례적인 인사말들 끝에 ‘여기 모인 대표분들이 대부분 남성들이지만, 모든 일의 공은 아내들에게 돌려야 한다. 오늘도 행사장에 와서 열심히 도와주시는 여성분들께 박수를 보내자.’라는 아빠의 말에 큰 호응은 없었지만,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아내를 내조자로 한정하고 위로하는 뻔해빠진 말이라 하더라도, 또 그게 빈말이라 할지라도 사람들 앞에 나서서 아내의 노고를 치하할 아저씨는 그 자리에 거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멋 부리느라 챙겨 입은 재킷에 땀을 뻘뻘 흘리는 아빠를 다시 병원에 데려다주면서 굳이 안 해도 될 고생을 한다고 핀잔을 주었다. 남들 앞에서 보이는 모습에 집착하지 말라는 조언도 했지만 아빠가 내 말을 진지하게 들을 리는 없었다.

3. 그냥 아빠


 아빠는 요즘은 내가 어떤 말을 하든 허허 웃는 사람으로 좋은 어르신의 풍모를 갖추어 가고 있다. “아빠는 촌구석에 평생 살아서 자기 잘난 맛으로 살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자식들은 잘난 친구들 보면서 마음고생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같은 말을 해도 그저 웃어넘긴다. 온 가족이 외식할 때 남동생이 감개무량한 목소리로 한껏 오버하면서 “우리가 다 같이 외식을 하다니, 이제 우리 집 잘 사나 봐.”라고 하면 조금 쓸쓸한 목소리로 “그때는 왜 짜장면 한 그릇을 못 사 먹었는지 모르겠다.”하며 웃기도 한다. 나도 마흔이 넘은 나이가 되고 보니 ‘이만하면 잘 살았다.’는 아빠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다.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아등바등 착실히 살았다.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살았다.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그래도 부족했다는 것도 안다. 그런 뜻이겠지.’ 나중에 내 딸 여름이가 나를 향해 원망을 퍼부으면 나라고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너에게는 부족하겠지만 나는 그래도 열심히 했다는 말 외에 할 말이 있을까?


 내가 옛날이야기를 하면 아빠는 엄청 놀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런 게 다 생각나느냐고 묻는다. 내가 목소리를 높여 “왜? 기억 못 할 줄 알았어? 아빠 잘 기억 안나는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 나는 다 알아. 좀 무섭지?”라고 다그칠 때 아빠의 눈동자는 불안으로 마구 흔들린다. 그리고 절대로 질문하지 않는다. 나도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아빠는 본인 말대로 철이 들지 않았고, 앞으로도 철이 들지 않을 것이며, 자기 속을 빤히 들여다보는 대신 악몽에 시달리는 쪽을 선택할 테니까. 닮았다 해도 아빠는 아빠고, 나는 나니까 화제를 바꾸기로 한다.


 아빠는 장녀인 내가 아빠와 닮았다는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내가?’라고 하지만, 부정하기에는 외모와 성품이 너무 닮았다. 두둑한 눈두덩이와 턱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좁은 구간에 동그랗게 붙은 턱살의 모양이 닮았고, 전체적인 신체 비율과 팔다리의 생김새도 비슷하다. 복잡하고 예민한 성격에 자신과 타인을 향한 평가의 잣대가 엄격하다. 사건의 세부 사항을 기억하기 때문에 얼렁뚱땅 넘어가는 일을 참지 못하고, 지나칠 정도로 지식인을 동경한다. 어린아이들이 구슬픈 트로트 부르는 걸 보면 나와 함께 혀를 차고, 정치적 올바름을 말할 때는 지역에 어울리지 않는 진보적인 의견을 내세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못된 입매의 입술이 사라질 듯하고, 눈빛이 사나워지지만 절대로 본인은 화를 내지 않았다고 말하는 아빠를 볼 때마다 거울을 보는 듯해 깜짝깜짝 놀란다.


 며칠 전 면허증 갱신을 하려고 증명사진을 찍었다. 친구와 스타벅스에서 셀프로 찍은 사진에 모로 비스듬하고 어색한 표정의 아빠가 보였다. 어느 겨울방학 아빠를 따라갔던 동네 사진관에서 청회색 점퍼를 벗지도 않고 어색하게 앉아서 찍은 아빠의 증명사진. 외로 삐딱한 자세로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사진을 본 엄마가 기가 찬다고 화를 내는 바람에 점퍼를 벗고 다시 찍으러 갔던 그 사진 속의 아빠가 내 얼굴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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