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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May 06. 2024

실로폰과 뽀빠이 바지

어린이날 떠오른 어린이 시절

*아이들 이름은 모두 가명이다.


 평리동 단칸방에 할머니와 둘이 살 때, 다세대 주택에는 또래 여자아이들이 나를 포함 네 명 있었다. 주인집 주연 언니(6학년), 2층에 사는 5학년 혜은 언니, 혜은 언니 집 옆 옥상으로 가는 계단 아래 방 두 칸짜리 집에 사는 3학년 정아와 주인집 큰아들과 방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는 4학년 나까지. 우리는 절친한 사이라 할 수 없었지만, 한 집에 사니까 자주 같이 놀았다.   집에서는 막내지만 우리 사이에서는 큰 언니 역할을 한 주연 언니는 늘 순하고 푸근한 느낌이었고, 흥분하면 살짝 말이 빨라지던 하얀 얼굴의 혜은 언니도 순둥하니 착한 언니였다. 혜은 언니를 따라 남묘호랭개교 예배당(?)에 따라가서 동시를 짓고, 학용품을 받았던 기억과 2층 집 거실에서 잡지를 보며 손지창과 김민종에게 팬레터를 썼던 저녁이 기억에 남아 있다.


 얼굴은 가장 흐릿하게 떠오르지만 오래 잊지 못할 에피소드의 주인공이기도 한 3학년 정아는 그 시절 보기 드문 무남독녀 외동딸이었다. 우리 집보다 별로 넉넉해 보이지도 않은 2층 구석방에 세 들어 살았지만, 꼬질꼬질한 느낌 없이 깍쟁이 같은 아이였다. 언니들과 다 같이 놀 때는 존재감이 별로 없는 막내였지만, 나와 둘이 놀 때는 아무렇지 않게 얄미운 소리를 하는 아이였다. 새로 산 인형이나 학용품을 자랑하면서 '언니는 이런 거 안 사?'라고 해맑게 묻는 어린아이일 뿐이었지만, 역시 어린아이였던 나는 그런 정아가 미웠다. 그래서 어느 여름날에 언니들과 놀면서 정아에 대해 뒷말을 해버렸다. 정아는 잘난 척을 하고, 나에게 언니들을 무시하는 말을 했다고, 30년이 지난 만큼 정확하지는 않지만, 정아를 모함하는 말을 한 사실은 분명하다.


 말하면서도 내가 이간질한다는 진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행동에 대한 책임을 바로 져야 할 거라는 것도 예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말은 입밖에 나와버렸고, 언니들은 지체 없이 정아에게 따져 물은 모양새로, 다음날 셋이 함께 나를 찾아왔다. 또박또박한 말투로 정아가 나에게 따져 물었다. 말문이 막힌 나는 문틀을 잡고 서서 몸을 비비 꼬다가, 방학 숙제는 다 했냐는 둥 헛소리를 했다. 딴소리하지 말라는 언니들의 날카로운 말에 내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아마도 열쩍은 모양새로 '내가 잘못 말했어. 미안.' 이랬겠지? 다행히 더 따져 묻거나 우는 상황으로 이어지지 않고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그 후에도 우리는 다 같이 잘 놀았다.


 어느 날, 엄마가 나를 보러 왔다.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잠깐 만나고 바로 시골로 가던 보통날들과 달리 이 날은 방과 후에 엄마가 집에 와 있었다. 드물게도 엄마는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물었다. 꼭 필요한 것이 있으면 사주겠다고 하는 엄마에게 나는 실로폰을 사달라고 했다. 학교 준비물이 아니어서 리코더나 멜로디언처럼 모두가 가지고 있는 학용품이 아니었다. 엄마가 사주었다며 정아가 자랑하던 게 실로폰이었기 때문이다. 골목에 실로폰을 들고 나와서 땅땅땅 두드리던 정아가 부러워서였다. 한 번 쳐보자고 하면 거만하게 동그란 채를 건네주고 내가 몇 번 두드리지도 않았을 때 다시 손을 내밀던 새초롬한 표정의 정아를 다시는 부러워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날따라 엄마는 자세히 묻지도 않고 실로폰을 사주었다. 48색 크레파스처럼 커다랗고 노란 케이스를 열면 무지개색으로 반짝이는 새 실로폰. 알록달록한 계이름 스티커를 붙이며 얼마나 기뻤던가.

 그날 엄마는 시장 상가에 가서 옷도 사주었다. 어떤 옷이 갖고 싶냐는 질문에 역시 정아가 입은 게 귀여워 보였던 멜빵 청바지를 사달라고 했다. 뽀빠이 바지라고 부르던 멜빵바지. 엄마가 골라준 멜빵바지는 너무 커서 정아처럼 귀엽지 않았지만, 본래 딱 맞는 옷을 산 적 없었다. 뽀빠이 바지는 3년을 입어서 졸업앨범에도 사진을 남겼으니 더욱 잊을 수 없는 옷이기도 하다.


 한 번도 가지지 못했던 마론 인형을 사려고 5학년 때 받은 세뱃돈으로 상가 앞을 서성이다가 주인아줌마에게 한소리 듣고, 덜 예쁘지만 가장 저렴한 인형을 사 와서 할머니에게 잔소리를 들을 때에도 나는 정아를 떠올렸다. 옷 가게에서 옷을 고르지 못하고 미적대다가, 점원이 들이미는 마음에 들지도 않는 옷을 사서 집에 올 때도 정아가 생각났다. 유치원에 간 여름이가 친구들처럼 반짝이 구두를 신고 싶다는 말을 할 때도 뽀빠이 바지가 떠올랐고, 유치원 준비물로 멜로디언을 준비하면서 조금 더 예쁘고 세련된 색을 찾으려 인터넷쇼핑을 뒤질 때에도 그때 샀던 실로폰이 떠올랐던 것이다.


 아이가 네 살일 때 옥토넛 상황극은 같이 해주지도 않으면서, 더 이상 나오지 않는 탐험선 장난감을 당근마켓으로 구해 나르던 것도, 관심 목록에 넣어둔 티니핑 놀이공원 장난감이 팔렸는지 매일 들어가서 확인하는 것도 실로폰을 향한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다. 어린이날이 지났어도 아직 팔리지 않은 티니핑 놀이공원... 여름이 생일 선물로 사둘 것인가 고민하면서 잠자리에 누운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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