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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Mar 26. 2024

아빠 이야기 1

어색한 아빠, 무서운 아빠

0. 어색한 아빠


 아빠와 친밀함을 느낀 경험은 별로 없다. 엄마와 나는 친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가까운 느낌인데 아빠와 나는 친하긴 하지만 가깝지는 않은 사이랄까. 분교 시절까지는 소풍이나 나들이 사진에 아빠가 있지만, 그 후에는 쭉 따로 살았던 아빠의 존재는 가끔 오는 손님이었다. 따로 살면 당연히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일이 없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셨어요? 같은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 따로 살아서 사이가 나빠지지도 않았다. 학교 시험 성적이 좋을 때, 가끔 만나는 아빠는 언제나 반가운 손님, 아빠가 오는 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할머니와 단칸방에 살던 겨울에 아빠가 일본어 학원에 다닌 적이 있다. 할아버지 때문에 좌절된 도시의 삶에 도전하기 위해 외국어를 배우려고 결심한 거였다. 저녁이면 일본어 교재를 펼쳐놓고 공부하는 아빠 옆에서 나도 신기한 일본글자를 구경했다. 아빠가 읽어주는 예문을 듣고 내가 빈칸 정답을 맞히자 뛸 듯이 기뻐했던 모습이 기억난다.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그 이야기를 하며 똘똘한 큰딸을 얼마나 자랑했는지! 일본어를 배워 취직하려던 아빠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지만, ‘아레와 토리데스까’(저것은 새입니까) 하던 예문이 쓰인 페이지는 지금도 그리라고 하면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다. 메리야스 공장에서 할머니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추어 아빠가 밥을 안쳤지만, 취사 버튼을 누르지 않아 생쌀이던 밥솥과 두 사람이 피우는 담배 연기가 자욱하던 방도 여전히 떠오른다.


 어린 시절 아빠가 나에게 품은 기대는 거대했다. 아마도 사법고시 합격 같은 환상을 품었을 것이다. 내 학업 성적의 현실적인 수준을 받아들이고 기대의 크기는 어느 정도 상식선으로 줄어들었다. 장녀가 교대나 사대에 입학해서 교사가 되기를 바라는 정도로 아빠의 꿈을 조정하는 동안 나는 반에서 가장 삐딱한 마음씨를 숨긴 모범생으로 살았다. 나의 목표는 오로지 국립대에 합격하는 것. 그 후에는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자유로워지는 것. 내가 그렇게 대학에 들어갔을 때 아빠는 많은 기대를 내려놓았을 것이다. 수학 성적이 낮다고 재떨이를 집어던지며 화를 내고, 모의고사 성적을 숨겼다고 시골에서 대구까지 달려와 담임 면담을 요청하던, 벌게진 눈으로 씩씩대며 화를 내던 아빠는 더 이상 나를 혼내지 않았다. 이런 기대를 또 품었으리라 쉬이 짐작할 수 있다. ‘고3 담임 말대로 복수 전공을 하고 열심히 해서 좋은 곳에 취직하겠지.’라든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겠지.’ 같은 종류의 기대.


 나는 여전히 내 나름대로 똑똑한 구석이 있는 아이였지만, 어른들이 원하는 대로 공부하고 취직하지 않았다. 나는 술을 많이 마셨고, 자주 우울했고,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 앞에서 좌절했지만, 아빠와 엄마는 내 문제까지 돌볼 여력이 없었다.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고 휴학한다고 했을 때, 아빠는 오랜만에 진지한 얼굴로 나와 독대했다. 졸업 요건에 맞는 자격증을 따고 아르바이트도 하겠다는 설명이 부족했겠지만, ‘친구들은 어학연수를 가고 공무원 시험 준비로 학원을 다니기도 하니 나도 무턱대고 졸업하기는 싫다.’라는 말을 하지는 못했다. 진심 어린 다정한 말투로 나를 달래려는 아빠에게 마냥 불안하고 돈이 하나도 없는 게 최악이라는 말로 상처를 줄 수는 없었다. 우리의 짧은 대화는 대충 이런 내용.

“나는 이날까지 살면서 별로 성공하지는 않았지만 이만하면 부끄럽지 않게 잘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네가 듣기에 어떨지 모르겠지만, 별다른 가정불화 없이 이 정도 살고 너희도 잘 자라주었다. 아빠와 엄마도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

 입을 열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겨우 쥐어짠 내 대답은 “친구처럼 편하게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지 않으냐.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였다. 나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아빠도 나를 붙잡지 않았다.


 아빠는 가끔씩 나와 대화를 시도했지만 성공한 적은 없었다. 아빠는 말할 줄 아는 사람이지만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내가 하는 말이 의미 있게 느껴지면 잠자코 들어주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아빠가 사는 시골의 삶과 내가 사는 도시의 삶은 서로를 더욱 멀어지게 했다. 아빠는 나에게 열심히 공부하라는 말을 반복했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내가 책을 읽으면 좋아했지만, 아빠와 주변 사람 중 그 누구도 책을 읽지 않았다. 아빠는 친구들을 만나면 밤새 술을 마시고 고스톱을 쳤다. 온갖 고생을 하며 농사를 짓고 부모님을 봉양했지만 원해서 한 일은 아니었다. 내가 보는 아빠는 별로 행복해 보인 적이 없고, 딱히 잘 살아온 것 같지도 않았고, 해 주는 것 없이 바라는 건 과한 사람이었다. 아빠가 자식들을 앉혀놓고 ‘이만하면 잘 산 인생’이라는 말을 반복할 때마다 코웃음을 치고 싶었다. ‘우리 가족은 가난하지만 화목하니까 행복한 가족’이라는 말로 우리를 가둘 때마다 발버둥 치면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가난하지만 화목한 가족 따위로 행복할 수는 없다고. 아빠를 노려보면서 말해주고 싶었다.

1. 무서운 아빠


 정신과나 상담센터 같은 곳에 가면 가장 오래된 첫 번째 기억을 떠올리라고 한다. 나는 일곱 살 때 당했던 성추행과 괴롭힘에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어서 20대 이후 만나는 불운과 불행의 원천을 그 기억으로 소급시키는 습관이 있었다. 화를 많이 내는 것도, 사람을 믿지 못하면서도 쉽게 곁을 내주는 성격이 내 안에서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어릴 적부터 불행했던 나’라는 우물을 파고 종일 들여다보곤 했다. 와중에 다행이라면 얼토당토않은 죄의식 대신 분노에 포커스가 맞춰진 점이랄까. 극복하더라도 평생 따라다닐 그 트라우마를 복기하느라 미취학 시기의 기억이 흐릿하다 못해 휘발되었다고 여기며 지냈다.

 결혼 후 살아온 인생의 총합보다 더 큰 화를 마주하게 되었다. 남편과 자주 싸우기도 했지만 그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어른이 되고 거의 처음으로 만난 혼자만의 시간, 그 시간에 나는 나와 사이좋게 지내는 법을 몰랐다. 들여다보다 덮어둔 마음의 병이 수시로 나를 공격해 왔다. 슬픔도 우울도 문제였지만 ‘화’가 버거웠다. 새벽 내 인터넷을 뒤지다가 발견한 <화의 심리학>이란 책(여러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을 읽기 시작했다. 책의 중반에 분노의 원인이 되는 사람에게 편지를 써보라는 제안이 있었다. 그럴 용기가 있다면 상대에게 전해도 좋고, 전할 수 없더라도 반드시 편지를 써보라는 말에 연습장을 펴고 파란색 플러스펜 뚜껑을 열었다.

 자연스럽게 엄마나 남편, 성추행범에게 쓰게 될 거라 생각했다. 늘 내 마음속에서 화를 내 온 상대들이니까. 몇 살 때인지도 알 수 없는 기억이 떠오를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편지를 쓴 대상은 아빠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실제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고 여기던 무서웠던 기억의 한가운데에는 아빠가 있었다. 전화기를 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아빠, 목에 핏대가 서고 온 얼굴이 시뻘게져서 고함을 치는 아빠의 표정, 엄마를 협박하는 아빠의 목소리, 울며불며 엄마 아빠를 부르며 애원하는 어린 나의 목소리. “당장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애들을 산에 끌고 가 죽여버리겠다.”라는 무시무시한 말. 나는 이 기억이 사실인지 아빠에게 묻는 편지를 쓰고 있었다.

 엄마가 힘든 결혼 생활과 시집살이를 한탄할 때, 반복되는 이야기에 지친 30대의 내가 이렇게 내뱉은 적이 있었다. “그렇게 괴로우면 도망가지 그랬어. 뭐 하러 있었어?” 엄마는 대답 대신 이번에도 남편의 폭력을 피해 도망 온 큰 이모를 그대로 돌려보냈다는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그날은 이렇게 대답했다. “도망갔었다. 한 번. 근데 너네가 눈에 밟혀서 올 수밖에 없었다. 자식 버리고 떠날 수 있는 여자들도 있지만 나는 그런 용기는 없었다.” 말문이 잘 막히지 않는 편이지만, 그때는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머리 가득 전화기를 들고 소리치는 아빠의 모습이 떠올라버렸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내가 그 기억을 부모님께 말하고 사실 여부를 확인할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그날 밤의 기억은 정말 일어난 일이었다. 할머니가 재단 가위로 머리를 잘라주다가 귓불까지 서걱 잘라버린, 진짜처럼 끔찍해서 현실과 혼동했던 꿈 이야기가 아니었다. 내 친구들 앞에서 언제나 유머러스하고 인자한 아빠, 시골 농사꾼답지 않고 세련된 아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도움을 주는 아빠. 나는 그런 아빠에게 분노의 편지를 썼다.

 내가 기억하리라고 여기지 못하겠지만, 아빠의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모습을 나는 다 알고 있다고. 그렇게 포악하고 못된 말을 해놓고 좋은 사람인 척 구는 꼴 같잖다고. ‘이만하면 잘 살았고 내 인생에 후회는 없다.’는 아빠의 말은 허울 좋은 자기기만일 뿐이라고. 그런 아빠가 원망스럽고 한심하다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화가 나면 앞뒤 없이 폭언을 내뱉는 모습을 내가 물려받은 것 같다고. 나는 아직 아이가 없지만, 죽는 한이 있어도 아이 앞에서 그런 꼴은 보이지 않겠다고. 갓 서른을 넘긴 그때의 아빠에 대한 공포가 서른이 넘은 나에게 남아있는 줄은 몰랐다고. 끔찍한 일이라고. 그렇지만 이 일을 내가 어떻게 모른 척하고 넘어가겠느냐고.

 그 싸움 끝에 아빠는 엄마를 데리러 갔고 돌아온 엄마는 두 번 다시 집을 나가지 않았으니, 그날 밤 전화 통화 후에는 필시 나에게 다정하게도 대했을 아빠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 안타깝지만 어떡하겠는가. 내가 아이에게 마구 소리를 지르다가 이 기억을 떠올리고는 퍼뜩 정신을 차리는 도구로나마 이 글을 쓸 수 있길 바라며 이렇게 써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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