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모할머니는 내 할머니의 동복이부자매(어머니가 같고 아버지가 다른 자매)이다. 복잡한 그들의 가정사는 잘 모르고, 할머니의 형제자매 중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다.젊은 시절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갔다가 돌아왔다던가?할머니의 딸(미국 고모)과 손녀(유나)는 어릴 적 여름방학이면 시골집에 내려오곤 했다. 자그마하고 호리호리한 몸집, 새하얀 피부에 세련된 짧은 웨이브가 돋보이는 회색 머리와 반짝이던 안경테, 렌즈 너머로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던 이모할머니는 내가 아는 시골 할머니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느 여름 방학에 서울말을 쓰는 유나는 롤러스케이트를 가지고 와서 한껏 으스대다 갔는데, 롤러스케이트를 타보려고 기를 쓴 것 외에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용산 미군부대 마트에 다닌다는 할머니와 고모가 사 온 미국과자는 짜고 딱딱해서 먹기 힘들었기 때문에, 나는 늘 "별 쓸데없는 걸 가져와서 잘난 척하는 서울할머니"라 여겼다. 그 후 쭉 LA에 살았기 때문에 그 여름방학 이후로 유나를 만난 적이 없고, 미국 고모는 한 번 만났던가 그랬다.
서울할머니는 젊은 시절에 경기도 어딘가에서 엄청 잘 나가는 레스토랑을 운영했고, 그 시절에 시골에 올 때는 기사가 딸린 까만 승용차를 타고 왔다고 했다. 딸과 손녀가 모두 미국에 가서 살았기 때문에 친정 손녀(?)인 나를 서울에 데려가 살고 싶다고 말했다고 했다. 엄마는 텔레비전에 강남이나 압구정 거리가 나올 때마다 "네가 서울 할머니 따라갔으면 저런 아가씨들처럼 되었을 텐데..." 하며 무언가 아쉬움을 표현했다.(어릴 때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엄마가 할 소리인가 싶네.) 그때 서울할머니를 따라갔다면 나는 완전히 다른 아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릴 적에는 그때 서울에 가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서울할머니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지금의 마음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는 아주 대찬 사람이었다. 영어를 섞어 말하는 서울 말씨에 욕도 잘하고 언제나 자기 의견 말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그런 점이 우리 할머니와 닮은 것 같기도 하다. 고모들이 엄마를 모함해(와병 중인 할머니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학대한다는) 우리 집을 뒤집으러 왔던 서울할머니가 오히려 엄마에게 용돈을 주며 "질부 고생한다. 내가 걔들 말만 듣고 안 왔더라면 어쩔 뻔했냐. 내가 따끔하게 한소리하마." 했던 일화는 평생 적진이었던 시가에서 엄마가 유일하게 노고를 인정받은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누워있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남동생이 대학에 들어갈 무렵 생활고가 극에 달했을 때 서울할머니가 대학 입학금을 내 준 감동스토리도 하나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자면, 내 입학금도 아닌걸.
20대 중후반 무렵 가을에 사과를 따러 시골에 간 적이 있는데 마침 서울할머니가 내려와 있었다. 할머니 체력에 밭일은 돕지 못하지만 밥을 차려주고, 새참 때가 되면 밭에 음식을 해서 가져와주었다. 할머니는 솜씨가 좋았다. 된장찌개와 겉절이, 갈비 같은 음식도 정말 맛있었지만 아직까지 기억나는 건 양파튀김이다. 우리 집에서는 해 먹은 적 없던 양파 튀김. 얼마나 바삭바삭하고 달콤하던지! 사과밭에서 허기져서 먹는 참이라서가 아니라 배가 불러도 집어먹을만큼 훌륭한 별미였다. 고급 일식집에서 나오는 튀김 같은 식감! 제사 음식으로 새우튀김과 오징어튀김을 오래 해온 엄마와 나는 도무지 구현하지 못한 식감이었다. 할머니는 식재료를 몽땅 사 와서 주방을 엉망으로 어지르면서 요리했다. 저녁설거지가 고생스럽긴 해도 종일 밥 걱정 하지 않아도 되니, 할머니는 든든한 일꾼이었다. 할머니가 입만 열면 자랑하는 미군부대 마트에서 산 재료들 덕분일까? 그 해 들밥 참 잘 먹었다.
"나이가 70이면 마음도 70일 것 같지만, 내 마음은 너희 나이 때랑 다른 게 없다. 그냥 나이가 들어서 못 하는 일이 많아졌을 뿐이지. 그나저나, 경이는 쌍꺼풀 수술 안 하니? 살 좀 빼고 쌍꺼풀만 하면 딱 예쁠 텐데! 조카야(우리 엄마), 조카도 겨울에 서울 와서 쌍꺼풀 해라. 우리 집에서 병원 가면 되잖아! 진이는 나이가 어떻게 되니? 이제 보이프렌드 없니? 곧 결혼해야 할머니가 진이 결혼식에도 가고 할 텐데... 더 나이 들면 내가 먼 길 오겠니?"
맛나게 먹는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할머니는 하고 싶은 대로 이야기했다. 할머니의 부추김에 엄마는 내심 겨울에 눈 수술을 하고 싶어 했고, 여동생은 노골적으로 기분 나빠했고, 나는 관심이 없었다. '저녁 메뉴는 뭘까, 맛있겠지.' 기대했을 뿐.
내 결혼식에 서울할머니는 오지 않았고, 사과밭에서의 만남 후에 서울할머니와 나 사이에는 별 이야기가 없다. 내가 굳이 요양병원에 누워계시는 서울할머니에 관해 쓰는 건 마지막 만남 후 몇 십 번이나 거절하고 수신 거부해 버린 할머니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다.
6월 말에 태어난 아이와 맞는 첫가을이었다. 지금이라면 아기와 집에 둘이 있는 편이 낫다고 여겼겠지만 그때는 너무 갑갑해서 시골 사과밭에라도 가고 싶었다. 남편이 나와 아기를 처가에 내려주고 역시 사과 농사가 바쁜 시가에 가기로 했다. 늦은 저녁, 엄마집에 왔더니 낯선 자동차가 있었다. 웬일로 서울할머니와 같이 사는 할아버지가 와 있었다. 좁은 집에 아기를 데리고 북적이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미리 알면 오지 않을까 봐, 일부러 서울할머니 소식을 숨긴 거였다. 역정이 났지만 차를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술을 마신 할머니는 나를 과하게 반겼다. 남편이 자기와 성이 같다고 엄청나게 반기며 연신 와인(역시 미군 매점에서 사 온)을 따라주었다. 모처럼 만나도 어제처럼 익숙한 미군 매점에서 사 온 식료품 자랑이 한 바탕 이어졌다. 목 힘이 약해서 흔들 인형처럼 흔들리는 아기의 머리를 보고 걱정스럽다고 의사를 찾아가라 하고, 액상 분유를 보더니 먹이지 말라고 걱정이었다. 아기를 재우고 식탁에서 같이 와인을 마셨다. 할머니는 자기가 태어나던 밤 별똥별이 떨어졌는데, 장손을 몹시 바라던 할아버지가 실망한 나머지 외양간 짚더미에다가 포대기에 싸인아기를 덜렁 집어던져버렸다는 살벌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런 법이 어디 있냐며 욕하고 웃었지만, 할머니가 내린 결론은 그게 아니었다. 나에게도 어서 남편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게 할머니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이런 젠장,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때 여동생에게 면허가 있었더라면 다음날 당장 나를 집에 데려다 달라고 했을 텐데! 피할 도리 없이 이틀 정도 할머니와 집에 있어야 했다. 아기를 귀여워하기도 했지만, 말끝마다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꼬"가 나왔다. 알코올성 치매라고 엄마가 여러 번 말했지만, 내 마음에는 그 정도 이해심이 없었다. 낮에는 촌동네를 온통 돌아다니며 할머니를 피했지만, 저녁밥상부터는 또 아들 타령과 술주정에 섞인 돈 떼인 사연을 들어야 했다.내 행동 하나하나 말을 걸고 간섭하는 할머니에 질려버린 나는 결국 남편을 불러 시가로 도망쳤다. 친정에서 시가로 도망치다니, 뭐 이런 말 같지도 않은 경우가 있어.
같이 와인을 마실 때 나는 할머니와 억지로 전화번호를 교환했고 "전화 안 받으면 안 된다."는 다짐에 "네네. 받을게요." 대답했다. 실수로라도 할머니가 건 전화를 받을까 봐 "서울할머니"라고 저장한 전화번호는 그 해 겨울 끈질기게 내 전화기에 떴다. 나는 수신차단을 눌렀고, 통화목록을 누를 때마다 서울할머니의 번호가 떠 있었다. 빨간 빗금이 그어진 수화기 모양.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지만, 전화를 받는 것보다는 덜 불편한 불쾌함.
전화를 피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엄마에게도 전화를 걸면 언제까지나 끊을 생각 없이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한다는 사정을 익히 전해 들은 바였다. 알코올성 치매가 심해졌다는 소식도 들었다. 남동생과 올케는 신혼 때 종종 서울할머니를 찾아갔다고 했는데, 서울할머니는 솔직하고 거침없는 특유의 성정으로 올케에게도 거리낌 없이 온갖 말을 한 모양이었다. 몸매가 어떠니, 다이어트가 어쩌니... 결국 남동생 내외도 발길을 끊은 지 한참이었다.
그런 사정을 다 들었는데, 무슨 좋은 소리 듣자고 서울할머니의 전화를 받겠는가? 우리 아기 내복 한 장 안 사준 주제에, 얼른 아들 하나 낳으라는 소리만 하겠지. 할머니도 시할머니도 돌아가시고 없지만, 그 자리를 다른 사람이 채울 필요는 없었다. 심적으로 가장 외로웠고 몸도 고되던 육아 초기 시절이었지만 시어머니에게 매일 영상통화를 걸지언정, 서울할머니의 전화는 받고 싶지 않았다. 수신거부 상태의 부재중 전화 기록이 대여섯 번씩 되는 날에는 차라리 전화를 받을까 싶기도 했고, 거절 문자를 보낼까 고민도 했지만, 할머니가 엄마에게 전화해 내가 전화를 안 받는다고 말했다는 소식에 다 그만두었다. '언젠가는 그만 걸겠지.'하고 기다렸더니 드디어 전화는 더 이상 걸려오지 않았다.
갓난 딸아이를 안고 간 내게 아들 타령 한 번 했다고 단 한 번의 전화도 받지 않은 내 반응은 스스로에게도 영영 개운하지 못한 기억으로 남았다. 작년 겨울 부쩍 치매기가 심해진 서울할머니는 요양병원에 갔다고 했다. 미국 고모가 한국에 들어와서 이런저런 서류를 정리하고, 서울에서 엄마 아빠와 한 번 만났다고 했다. 나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지만 미국 고모 역시 우리 집을 어떤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는 일가친척이 하나도 없는 건지, 서울할머니에게는 형제자매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번도 나에게 큰 존재는 아니었던 서울 할머니, 할머니 전화를 한 번은 받을 걸 그랬나? 늘 이렇게 때가 늦어서 떠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