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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오니다온 Nov 23. 2019

언어조차 무용(無用)한 <최악의 하루>에 대하여

한국 독립영화 3

때때로 타인을 위로하는 언어는 나약하다.


 추상적인 언어에 의존하는 위로의 말은 때로는 일차적인 기표로 통용되곤 하지만, 그렇기에 그것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쉬운 것이기도 하다. 보통 위로가 되는 것은 언어 자체보다 나를 걱정하는 당신의 표정, 내 기분을 살피기 바쁜 당신의 눈, 그러다가 허공에서 눈이 마주치면 갑작스레 터져 나오는 웃음. 그런 종류의 흔적에서 슬며시 보이는 ‘진심’ 일지도 모른다.


은희는 ‘곤경에 처한’ 여자다. 복잡한 골목을 헤매던 료헤이는 은희에게 길을 묻고, 둘은 익숙하지 않은 이국의 언어로 대화를 이어간다. 소설가인 료헤이는 스스로를 ‘거짓말을 만드는 사람’으로 소개하며, 배우인 은희 또한 자신을 ‘같은 업종’이라고 소개한다. 은희는 료헤이에게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호명을 유예한 채로 마음 편히 진심을 내비친다.



한편 은희의 오랜 남자친구인 현오는 언어로 은희를 할퀸다. 이름 대신 ‘야’로 은희를 호명하며, 심지어 양다리를 걸치던 다른 여자의 이름으로 은희를 부른다. 은희는 빠른 걸음으로 현오에게서 멀어진다. 은희는 빠른 속도로 걷고, 호흡이 거칠어지고, 가방이 무거워 거듭 고쳐 매고, 카메라는 그런 은희의 걸음을 그저 따라간다. 남산의 중턱쯤, 은희는 양다리 상대였던 운철을 만난다. 운철 앞에서의 은희는 현오 앞에서의 은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운철의 말도 안 되는 궤변에도 은희는 과장된 표정과 목소리로 눈물을 흘려준다. 결국 은희를 따라온 운철과 현오가 남산 어딘가에서 만나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 순간, 그러니까 은희의 모든 거짓말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버린 순간, 은희는 ‘땅 파고 뒈져버릴’ 심정으로 주저앉아버린다. 거짓이 벗겨지고 진실만이 남은 순간 은희는 철저하게 혼자이며 꽤 비참하다.



은희는 남산에 혼자 앉아 영화 첫 장면에 등장하던 독백 연기를 한다. 그것이 연극 대사임을 알지만 동시에 영화에서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은희의 ‘진심’의 순간임을 안다. 그날은 은희에게 ‘긴긴 하루’였고, ‘하나님이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었으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풍경에는 제각각의 속도로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은희의 어느 순간처럼 걷는다. 그들은 얼마만큼의 진실과 얼마만큼의 거짓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우리는 은희의 말대로 ‘살고 있는 게 연극’이 되어버리는 순간들을 자주 마주한다. 은희는 스스로가 거짓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을 통용되는 부정적인 의미의 거짓말로 여기지 않고, 관계에 따라 바꿔 끼우는 하나의 가면과도 같다고 여긴다. 현오와 운철에게, 어쩌면 영화에 등장하지 않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기 위해 자신을 꾸며낸다. 마치 현오를 만날 때는 머리를 묶지 않고 운철을 만날 때는 머리를 묶는 것처럼, 그것은 어쩌면 아주 사소한 차이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은희에게 낯선 이국의 언어는 잠시 모든 거짓말을 멈추게 만든다. 료헤이와는 투박하고 원초적인 수준의 언어로, 손짓과 표정을 섞어야만 겨우 단순한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거짓을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관계, 애초에 내게 원하는 것이 없기에 무언가를 꾸며내지 않고도 유효할 수 있는 관계. 우리는 그런 관계를 맺을 누군가를 찾아 끝을 알 수 없는 산책로를 무작정 걸어가는지도 모른다.


오늘 하루, 겹치는 우연 혹은 필연은 은희를 최악의 하루로 밀어 넣었다. 세 인물의 대면은 한 편의 희극을 보는 것처럼 우스꽝스럽기까지 해서 그들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카메라는 그저 은희의 복잡한 표정을 응시한다. 그 찰나의 표정은 어떤 언어보다 더 간절하고 절박한 울림이었다. 은희는 그런 하루의 끝자락에 몰려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그녀에게 주어진 것은 낯선 타인이 건네는, 최소한의 언어로 구성된 최선의 위로였다. 의미조차 알지 못하는 일본어가 위로가 되는 밤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해피엔딩일 거예요’라며 은희를 토닥이던 료헤이는 존재 자체로 위로였으며 그 하루의 마지막에 서 있던 기적에 다름없다.


사실 언어는, 아무것도 아니다. ‘진실이 진심을 이겨요?’ 따위의 복잡한 말은 무의미하다. 달빛 아래서 펼쳐진 은희의 춤, 그런 은희를 향한 료헤이의 박수 소리, 말없이 같은 곳을 응시하며 걷는 시간들, 그 사이에 틈을 내어 얽히는 시선들. 언어가 부재한 위로는 서로에게 이토록 완벽하게 들어맞을 수 있다. 나는 지금, 다시 언어의 무용(無用)함에 대해 생각한다. 언어 너머에 있는 감정들을 표현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언어’들이 되려 그 솔직한 감정들을 침식해가는 요즘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감히 당신이 최악의 하루, 그 끝자락에 매달려 있다고 생각한다면 조용한 곳에서 이 영화를 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최악의 하루를 보낸 여자와 그 여자를 주인공으로 해피엔딩을 빌어주는 남자를 만나기를 바란다.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조심스럽게 건네는, 최소한의 언어로 구성된 최선의 위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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