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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오니다온 Sep 09. 2019

<벌새>, 이상하고 아름다운 시절을 지나는 날갯짓

한국 독립 영화 1

"제 삶도 언젠간 빛이 날까요?"


열다섯, 그 나이의 나는 내가 너무 안쓰러웠다. 영화에서 '나는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는 외침으로 대표되는 보편적으로 성공한 삶, 좋은 대학교에 대한 기준은 폭력적이었다. 덕분에 그 시절 나는 내 감정의 대부분을 실패, 상실감, 분노 같은 단순하고 부정적인 단어로 기록했다. 감정의 폭은 감당이 되지 않을 만큼 컸고, 그에 비해 내가 가진 언어는 너무도 얕았다. 주변을 부유하던 대부분의 감정은 정리되지도, 가시화되지도 못한 채 미해결 과제로 남아 만성적인 침묵이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내게 영지 선생님이었던 Y에게 "제 인생도 언젠가 빛이 날까요?" 묻는 것이 내가 가질 수 있는 희망의 전부였다.



Y는 영지 선생님처럼 떠나 버렸다. 돌아가면 모두 얘기해줄게, 그런 약속 같은 것 하나 남기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자주 은희처럼 선생님이 너무 좋아요, 했다. 그러면 Y는 나를 꼭 안아줬다. 그 시절 Y가 내게 남기고 간 몇 장의 편지들은 한때 내 삶을 지탱하는 모든 것이었다.



삶은 자주 이상하다. 다리가 어떻게 무너지니, 그 큰 다리가. 영지 엄마의 공허한 외침처럼 우리 삶에서는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던 - 우리가 멋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것들이 너무도 쉽게 무너진다. 학기가 바뀌었다는 이유로 보라는 맹목적이던 애정을 거둬갔고, 순간의 두려움은 단짝이던 지숙과 은희의 사이를 갈라놓았으며, 상처를 내며 싸우던 은희의 부모님은 하룻밤 사이에 무너지고 회복되기를 반복한다. 이런 인생에 있어 '왜?'라는 질문은 중요하지 않다. 그 질문 앞에서 모든 인생은 무기력해지기 때문이다. 다만 어느 순간을 지날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 순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안다. 피할 수도 없다. 그저 그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그럼에도 삶은 가끔 다정하다. 싸운 두 아이를 보면서 너희 어서 화해해, 따위의 무책임한 말 대신 잘린 손가락-으로 시작하는 노래를 불러주는 영지 선생님이 그랬고, 병실에서 은희에게 매실 장아찌를 건네던 손길이 그랬다. 은희에게 꽃을 선물하던 보라가 그랬고, 부모조차 묵인하는 폭력의 증거를 챙겨주는 의사가 그랬다.



그래서 은희는 살아낸다. 가장 소중하던 것의 상실 앞에서 울지도 않는다. 은희는 그저 감자전을 먹는다. 등교를 하고 수학여행을 가는 날 아침에는 김밥을 먹는다. 소란스러운 운동장에서 친구들을 바라보고, 조용한 집에서 영지 선생님의 편지를 읽는다. 카메라는 시시각각 변하는 일상의 무게를 견뎌내는 은희의 표정을 오래도록 보여준다. 은희를 섣불리 동정하지도, 응원하지도 않은 채 거리를 유지한다. 은희는 무기력한 순간에는 열 손가락을 가만히 바라보고 손가락을 움직인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스스로 견뎌내는 법을 배운다. 성숙하게 이별하고, 한 세계를 떠나보내는 방법을 배운다. 아마 은희는 가끔 울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손가락 하나가 잘려 나가는 환상통을 앓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살아낼 것이다. 지금 내가 그러는 것처럼. 또 세상의 모든 보편적인 은희가 그렇듯이.




보편적인, 동시에 비밀스러우며 찬란한 어느 순간들은 감히 우리를 살게 만든다. 영지 선생님의 편지처럼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다우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무너지면서도
계속 살아가고자 하는 생의 의지를 다지는 것이겠지.



내게도 영지 선생님이 있었다면, 보다 

내가 누군가에게 영지 선생님이 되어줄 수 있다면, 에 

가까워졌다고 느낀 어느 가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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