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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 Joy Feb 18. 2021

머랭이 머랭

제빵 일지_01

손으로 하는 일들을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미술학원에 다녔다. 학창 시절을 통틀어 피아노 학원 말고는 학원에 보낸 적이 없는 엄마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미술학원을 보내주셨다. 그 짧은 몇 개월 학원에서 배운 가락으로 한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미술대회에서 간간이 상을 받아왔다. 하지만 미술에 큰 재능이 없다는 것은 어린 나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반드시 같을 필요는 없으니까, 좋아하는 일을 못 한다고 해서 불행해지는 것은 아니니까 상관없이 손으로 하는 일에 줄곧 관심을 가졌다. 밥로스 아저씨의 <그림을 그립시다>는 그림으로는 더는 상을 받지 못하는 나에게 화가의 꿈을 심어줬다. 아주 잠깐, 수채 물감과 8절 스케치북으로 아저씨를 따라 하다 크게 좌절하기 전까지 진심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진로 선택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만들어볼까요?>도 아주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이었다. 직접 만들기보다는 그저 보면서 ‘해보고 싶다.’ 침만 흘리는 편이었지만, 그 시간을 꼭 기억하고 챙겨 보는 중이었다. 그러다 내키는 날엔 재료 부족과 기억력 한계로 완전히 같은 것은 못 만들더라도 비슷한 무언가를 만들고 만족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작정하고 다음 주 예고에 나오는 준비물을 찬찬히 다 준비해 TV에 나오는 대로 따라 만들기도 했는데, 결과가 성공적이었는지 어땠는지 잘 기억나진 않는다. 아마, 완성도 80% 정도가 아니었을까?




고등학교 다닐 땐 십자수가 유행했고, 반에도 몇 명정도 십자수 동지들이 있었다. 용돈의 한계로(어쩌면 자신을 알아서?) 큰 작품은 만들지 않았지만, 한동안은 십자수에 빠져서 꽤 몇 개의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그 당시 같은 반에 십자수를 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축구를 좋아하는 정말 십자수를 할 것 같지 않은 아이였다. 그런데 그 애의 스케일과 열정은 나보다 훨씬 컸다. 그전까지 별로 친하지 않았는데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대화도 나누고 십자수에 대한 정보를 나누기도 했다. 그 아이의 십자수는 물론 앞면도 훌륭했지만, 핵심은 뒷면이었다. 뒷면이 앞면을 그대로 뒤집어 놓은 것처럼 깔끔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십자수를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기도 하다가 손으로 하는 일을 잘하기 위해서 재능에 부쳐 이 정도 꼼꼼함과 집착은 있어야 하는구나 어렴풋이 깨달았던 순간이었다. 어쨌든 십자수는 난도가 높지 않았기 때문에 앞면만 본다면 내 완성본들도 봐줄 만했고,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그렇게까지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내 십자수의 뒷면은 여전히 이리저리 얽혀 있는 거미줄 같았다.


어릴 때부터 미술 시간을 좋아하긴 했지만, 고등학교 때 미술 시간은 더 특별했다. 딱 1년, 2학년 때만 미술 시간이 있었는데(1학년 때는 음악을 배웠다. 고3 때는 수능과 상관없는 예체능 중에 겨우 체육만 남아 있었다) 칠판만 보고 있어야 하는 수업 시간 사이에 일주일에 한 번 미술은 유일하게 생산적인 인간이 된 것 같은 성취감을 맛보는 시간이었다. 물론 미술 시간에 그리고 만들어 낸 것의 결과가 아주 훌륭했던 것은 아니지만 간혹 칭찬을 받기도 했고, 그 시간에 하는 일들은 지루하지가 않았다. 게다가 그 당시 열여덟의 눈으로 보았을 땐 성적순으로 줄을 세우는 선생님들(모든 선생님이 그랬던 건 아니다, 자격지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이에서 미술 선생님은 참 스승 같은 분으로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수능 압박에 찌든 우리에게 선생님은 시험의 압박에서 벗어나 인간으로 누려야 할 것들을 누리게 해 주는 시간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선생님은 좋은 분이셨다. 선생님은 따뜻한 눈빛으로 아이들 그림 하나하나를 살펴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우리가 인생에서 짧은 순간이라도 미술을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셨던 것 같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이웃집 토토로>와 <귀를 기울이면>을 본 것도 미술 시간이었다. 그 후 선생님 덕에 지브리가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세계를 찾았고, 푹 빠져들어 새로 개봉하는 작품은 물론이고 아주 오래된 작품들까지 찾아보았다. 미술과 이야기, 좋아하는 두 가지 중 어느 하나 실망할 부분 없이 완벽했다. 거기에 아름다운 선율이 더해져 음악, 미술, 문학, 예술 종합세트가 눈과 귀와 마음을 충만하게 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깊은 속내까지 파고들어 알아낼 만큼 예리하고 영리한 팬은 아니었지만, 눈 앞에 펼쳐지는 그 세상과 이야기에 매료되어 오래 머무는 편이었다. 지브리뿐 아니라 일본 애니메이션을 찾아보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으니 선생님은 미술을 즐길 수 있는 확실한 방법 한 가지는 전수해 주셨다.


<미술 선생님 덕에 알게된 신세계> *출처 :naver.com


고등학교 때 아주 아주 많이 만든 것 중 하나는 바로 편지지다. 그때는 노트를 찢어서, 잡지를 오려서 편지를 많이도 썼는데, 편지가 아니면 소식을 전할 수 없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펜팔 친구한테 보내는 건 아니었고, 매일 같은 교실, 옆 교실에서 같이 공부하고 심지어 기숙사로 같이 하교하는 친구들에게였다. 자습실에서 몇 발짝만 가면 닿는 친구들에게 왜 그렇게 많은 편지를 썼는지. 공부하라고 앉혀 놓은 책상 앞에서 색색깔 펜과 커터칼로, 때로는 라이터와 접착제까지 동원해 정성스레 편지지를 만들고 내용을 채웠다. 말하자면 그리고 칠한 편지지가 내용이고 편지글이 또 장식인 상호보완적이면서 [완벽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작품은 모두 친구들에게로 갔지만, 친구들의 작품은 아직도 내 편지 상자에 고이 간직되어 있다. 편지를 덜 썼다면 수능 점수가 더 잘 나왔을까?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그 시절은 더 삭막했을 것 같다 (솔직하게는 수능성적은 편지지 만들기와 상관없이 비슷했을 것 같긴 하다).

고등학교 때 만든 건 아니지만, 뭐 이런 식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로도 이런 짓... 활동을 꾸준히 해 왔다.




대학교 때 했던 수작업은 뜨개질이었다. 남자 친구에게 무엇을 선물할까 고민하다 나온 결론이었고, 해 봤자 목도리가 최선이었지만, 뜨개질 반복 작업은 무념무상의 세계로 인도했고, 늘 ‘쓸데없는’ 생각이 많은 나에게는 치료제 같은 역할을 했다. 그때 뜬 목도리를 남자 친구는 하고 다니지 않았고, 겨울이 생일인 지금 남편에게도 목도리를 떠서 선물한 적이 있는데, 역시 선물했다는 데 의의를 둘 수 있었다.


세이브 더 칠드런에서 하는 신생아 살리기 캠페인은 신생아들의 체온을 유지해줄 털모자를 떠서 보내면서 출산 환경이 열악한 곳의 신생아와 산모를 보호하는 캠페인인데, 결혼 후엔 남자 친구 목도리 대신 먼 곳의 아기들을 위한 뜨개질을 했다. 생각보다 모자 뜨기가 쉽고, 신생아들을 위한 모자이다 보니 크기가 작아 금방 뜰 수도 있는 데다가 완성작이 앙증맞기 이를 데 없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모자를 아프리카로 보냈고, 내친김에 남편과 내 모자까지 떴다. (둘 다 쓰고 다니지 않았다….) 그때는 바야흐로 첫 아이의 임신 때, 대바늘과 남아 있는 털실들은 신생아 모자 뜨기 키트가 들어 있던 상자에 고이 보관되었지만, 첫 아이의 탄생으로 나의 뜨개질은 그만 막을 내리고 말았다.


신생아 살리기 캠페인으로 뜬 털모자(그 와중에 벽지 무엇?)




<제빵왕 김탁구>의 영향이었을까, 밥이 주식인 우리나라에 홈베이킹이 시작된 것은? 생각해 보면 엄마도 카스테라를 만들어 주었고, 남편도 어릴 적에 엄마가 빵을 만들어 주셨다고 하니, 이미 홈베이킹은 아주 오랜 역사가 있겠다. 하지만 어느 집에서 어떤 빵을 만드는지 본격적으로 알게 해 준 것은 World Wide Web의 연결로 인한 자랑질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혼 초 꽤 열심히 블로그를 했는데, 바이럴 마케팅이 뜨고 있던 때라 블로그를 통한 다양한 분야의 홍보가 있었고, 인기 블로거들은 광고대행 역할을 했다. 그리고 제야의 고수들은 수익과 상관없이 일상의 정보와 기술을 블로그에 멋들어지게 전시했다. 엄마인 고로 제빵에 큰 관심이 갔다. 빵을 좋아하기도 하는데, 아이들에게 직접 만든 좋은 것을 먹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기 전에 손으로 할 아주 좋은 거리를 찾았기에 홈베이킹에 대한 소소한 열망은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븐을 구입하기에 항상 빠듯한 가계 형편이었고, 없는 와중에도 싸고 좋은 것을 찾아 누리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무작정 사지 않고, 하지 않아서 아끼는 편이었다. 그러니 오븐도 제빵도 선뜻 시작할 수가 없었다. 천불생 무록지인(天不生 無祿之人)이라는 말이 정말인지 아이가 한 명씩 태어날 때마다 형편이 조금씩 나아졌고 마침 놀러 간 친구 집에 놀고 있는 오븐이 있어 싸게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오븐을 받아오던 때는 아주 야심 찼지만 매일 정신없는 육아의 늪에 허덕이던 시기라 쉽게 시작할 수가 없었다. 오븐으로 누룽지나 굽던 중에 용기를 내어 쿠키믹스를 사 와봤다. 믹스로 쿠키 굽기는 어렵지 않았고 다만 건강을 중요시하는 생*에서 사 와서 그런 것인지 좀 딱딱하고 덜 단 것 같았다. 모양이야 뭐, 첫 쿠키니까 그러려니 해 주자. 그래도 쿠키 틀 모양이 나오긴 했다고!

다음으로 시도해 본 것이 호박 쿠키라는 것이었는데, 계획에 없이 사 온 단호박을 어디에 쓸까 고민하다가 구워봤다. 음……. 다시는 호박 쿠키를 만들고 싶지도 먹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자세한 과정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어쨌든 처음 시도한 쿠키들의 특징은 넓적한 찐빵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는 정도의 기록을 남긴다.



<그 간의 기록들, 첫 쿠키, 호박 찐ㅃ.... 쿠키, 그나마 제대로 나온 치즈 쿠키>




베이킹 초보자가 머랭을 시도했던 이유는 다 백 주부님 때문이었다. 그 당시 백 주부님은 대한민국 주부들이 “이번 끼니는 뭐 먹지?"라는 명제로 고통당하고 있을 때 등장한 해결사였다. 백 주부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주부들 사이에서 메신저로 퍼지고 블로그로 퍼져 너와 나의 밥상 대 통합을 이루기도 했다. 그 시절 주부 중(나이, 지역, 성별을 막론하고) 만능 간장 한 번쯤 안 만들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백 주부님은 한식, 양식, 중식, 분식, 퓨전 종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음식의 비법을 전수했는데 느끼한 양식을 좋아했던 남편과 나를 위해서 “진짜" 까르보나라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이 전까지 알던 까르보나라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말하는 그 까르보나라가 아니었고 가짜 까르보나라인 크림 파스타도 좋긴 하지만 진짜는 또 얼마나 맛있을지 경험해 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오리지널 까르보나라에는 계란 노른자가 들어간다, 말인즉슨 노른자를 쓴 만큼의 흰자가 고스란히 남는다는 뜻이다. 과연 백 주부님의 비법으로 만든 요리는 맛이 있었지만, 투명하게 찰랑거리는 저 흰자들은 대체 어쩐단 말인가! 그냥 흰색 알고명이나 부치거나 흰자 스크램블을 만들었어도 무방하겠지만, 흰색만 있는 알고명을 어디에 올리지, 흰색으로만 된 스크램블은 정말 맛이 없어 보일 거 같은데…….

“계란 흰자 요리”로 검색을 했더니 쉽게 머랭 쿠키가 나왔고, 선택은 필연적이었다. 베이킹 초보 주제에 베이킹용 핸드 믹서기도 없으면서 머랭을 도전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몰랐다.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집에는 우유 거품 낼 때 사용한다는 작은 핸디 거품기가 있긴 했다. 어디서 사은품으로 받은 건지 아니면 베이킹할 때 써 보려고 사 온 건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든든했다.

  

계란 흰자 넉넉하고 백설탕이야 늘 집에 있으니 도저언!
<머... 다... 머... 달ㄱ...>

첫 번째 난관은 모두가 예상했듯이 계란 흰자가 머랭이라는 것으로 변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팔이 떨어지라 젓고 또 저어, 남편 팔 빌리고 톡 하면 부서질 것 같은 핸디 거품기 동원하고, 또다시 내가 돌리고 했다. 아무리 해도 그 단단한 뿔은 올라오지 않았다. 겨우 어떠한 형태가 나오는 것 같을 때 얼른 짤 주머니에 넣고 조심스레 짜보았다. 다행히 짜 놓은 머랭 형태로 보아 쿠키 비슷한 게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두 번째 난관, 머랭 쿠키를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생긴 게 어떤 맛을 내는 게 머랭 쿠키인지 모르는 나로서는 오로지 블로그 레시피와 사진만으로 완성에 다가가야 했는데, 불안은 자꾸 ‘조금 더’를 외쳤고 결국 달고나 색을 가진 맛도 달고나 닮은꼴인 말하기 전에는 알아보기 힘든 그런 머랭 쿠키를 만들어버렸다. 어쨌든 아주 못 먹을 맛은 아니고 양도 그리 많지 않아 아이들과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머랭 쿠키의 맛은 알 수가 없게 됐지만, 다음엔 흰자가 남아도 머랭 따위, 머랭으로 만드는 쿠키 따위는 만들지 않으리라.




독일로 오면서 이래저래 모았던 제빵 도구들을 모두 싸 들고 왔다. 친구에게 중고로 샀던 오븐만 다시 중고로 판매했지만, 이곳이 어디인가 유럽 아닌가. 빵이 주식인 자들의 부엌에 오븐은 필수 옵션이었던 데다가 고맙게도 원래 살던 사람들이 부엌을 뜯어가지도 않았고, 자기들이 오래오래 살려고 만든 부엌이었던지라 세팅도 잘 되어 있었다. 가사노동 도우미 삼대장이라 불리는 식기세척기도 있었고, 전기 레인지 아래에는 당연하게도 꽤 크고 좋은 오븐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다. 그 커다란 오븐은 나의 제빵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초반에는 냉동 생지나 사 와서 아침 빵 굽는 정도로 가볍게 시작했다. 독일이라는 새로운 공간과 생활과 사람들에게 적응하고 아이들의 적응을 지지하는 것만으로도 꽉 찬 나날들이었다. 두 번째 신혼(오해하지 말자,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로맨틱한 신혼이 아니다)으로 여간 에너지가 많이 드는 것이 아니었다. 메뉴는 돌고 돌아 다시 그 오리지널 까르보나라가 식탁에 올라갔고, 또 흰자는 반찬통에 고스란히 남았다.

그래, 지금이야, 난 이제 초보가 아니야!


이것은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베이킹 도구들 좀 생겼고 그간 쿠키나 머핀, 파운드케이크 같은 것들은 몇 번 구워 보았지만 나는 여전히 초보였다. 머랭 칠 때 계란 온도가 중요하다는 것 따위는 알지도 못하는 생초보. 그래도 호기롭게 다시 레시피를 찾았고 도전했다!


핸드 믹서기를 아무리 돌려도 흰자들은 뻑뻑한 거품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겨우 도달한 곳이 약간 끈기가 있는 하얀 액체였는데 끈기가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액체였기에  주머니에서 그것은 줄줄 흘렀다. 그래도 간격 맞춰 동그랗게  놓고, 기왕 시작한  하는 만큼 해보자 하고 구웠는데,  구운 머랭은 색깔은 고운  빛으로 약간 쌀과자처럼 되었으나 유산지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유산지에서 긁어먹어야  판이었다. 결국 머랭 쿠키라 불려야 했던 그것과 유산지가 엉망진창으로 찢기고 부서졌을  웃음기 하나 없이 한숨처럼 이런 말만 새어 나왔다.

머랭이 머랭?


하지만 독일 생활에서 제빵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으니…


<화나따!화나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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