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다운 기간에 하게 되는 게 세 가지 있다.
인별그램, 산책, 그리고 한글 떼기.
스트레스가 차오르면 자꾸 SNS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는데 그러다 보면 자꾸 나도 뭘 올리고 싶어 진다. 인별 갬성 사진 따위 찍을 수 없는 사진 무능자이기 때문에 아직은 귀여운 아이들 사진이나 일상에서 일어난 웃픈 사연들을 코믹하게 올리는 편이다. 물론 긴 글은 없다. 해시태그의 연속을 짧게 짧게 치고 나오는 게 인별그램의 정석!
산책은 독일과 한국 생활의 큰 차이점이다. 한국에서 가족이 다 함께 하는 산책은 일 년에 몇 번 갈까 말까 한 큰 행사였지만, 이곳에서는 일상의 연장이다. 산책 없는 일상은 생각할 수가 없달까. 해가 길어지는 3월 이후에는 아빠가 퇴근하고 저녁을 먹고도 시간이 아주 많이 남아 저녁 산책을 하러 가기도 했다. 정말이지 한국에서는 꿈도 못 꿨던 일이었다. 주말은 온전히 가족의 시간이라 산책이든 어디든 가야 했으므로 우리는 아주 많이 차로, 발로 이동했다. 여행이나 나들이 코스에 일부는 꼭 산책이었다. 도시마다 마을마다 공원과 산책로가 잘 조성된 이곳에서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처음 왔을 땐 유모차를 타던 녀석도 이젠 누구보다 맹렬하게 걷는 아니, 뛰는 어린이가 되었다!
우리의 산책로는 마을이 아니라 여행을 간 도시의 공원, 근처 가장 큰 도시인 뮌헨(우리는 뮌헨에 살지 않는다)의 공원들, 그리고 근처 작은 도시의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공원이었다. 이민 초기에 마을 정탐 겸 산책을 몇 번 하고, 지인들이 방문하면 가끔 마을을 돌았다. 한국에서 부모님이 방문하셔서 머물 때 아이들과 함께 마을을 많이 걸었던 것 정도.
작년 3월 외출 제한이라고 하니 괜히 더 나가고 싶어 근질근질했다. 어른도 그런데 나가 사는 게 일상인 우리 집 어린이 세 분이야 오죽하셨겠는가. 일상의 패턴이 죄다 사라지고 집에만 있으라니 이건 정말 아이들에게도 아이들과 24시간 함께 해야 하는 부모에게도 가혹한 처사였다. 실제로 COVID-19 사태로 각국의 우울증을 포함한 신경 정신 질환의 증가, 가정 폭력의 증가는 다른 측면에서 우리가 싸워야 하는 이 바이러스의 악영향이었다. 그래서 이곳의 많은 가족이 예방과 치료의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산책"이었다. 처음 외출 제한령이 내려졌을 때 허용되었던 것이 가족끼리의 운동, 산책이어서 그거라도 열심히 해본 것 같다. 우리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마을 구석구석을 그렇게 다녀 본 것은 코로나 확산 이후가 처음이었다. 산책은 열악한 환경에도 건재할 수 있다는 마지막 끈을 붙잡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바로, 한글 떼기!
물론 내가 한글을 떼야하는 것은 아니고(본인은 독일어를 떼야합니다) 아이들이 대상이었다.
이민자의 아이들이 현지의 언어를 따라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모국어를 잃어버리지 않게 지키는 일이 숙제로 주어진다. 깨어 있는 시간의 반 이상을 유치원에서, 학교에서 독일어로 생활하는 데다가 그곳에서 지식을 얻다 보니 새로운 단어와 표현들은 모국어가 아닌 이 땅의 언어이다. 큰아들 민트는 한국에서 좀 이르다 싶게 한글을 가르쳐 스스로 책을 읽고 쓰고 싶은 말을 쓸 수 있을 정도가 되어서(맞춤법은 논외) 독일로 왔다. 한국에서 살았던 시간이 동생들보다 길기도 했고, 한글책 읽기도 좋아하고, 아직은 한국어가 더 편한 모양이었고, 셋째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일에 더딘 편이어서 그런지 독일어가 아직 서툴다.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하는 부분은 막내가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로 이곳으로 왔음에도 한국어가 어느 정도 정착된 후에 독일어 환경에 노출되었고, 한국어가 꽤 발전될 때까지 독일어는 귀가 열리는 시간만 가졌던 것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둘째인데, 쪼꼬는 워낙 관계 지향적인 인간이다 보니 말을 안 하고는 배길 수가 없었나 보다. 새로운 언어를 빨리 익혔고, 이제 한국에서 살았던 날보다 이 곳에서 산 날이 더 길다 보니 ‘한국어 보호 구역'인 집에서도 툭툭 독일어를 뱉었다. 혼잣말을 했고, 형에게도 자꾸 독일어로 말을 걸었고, 한국어 단어를 떠올리지 못해 한참 뜸을 들이곤 했다. 저 혼자 독일어를 할 때마다 “집에서는 한국말”, 이라며 단속을 하고 독일어로 뱉은 단어를 기어이 한국어로 교정하고, 두세 번 반복하여 익히도록 신경을 쓴다. 우리 집 한국어 수호에 둘째가 중요한 키를 쥐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녀석이 한글에 관심이 없었다. 첫째에게 한글을 빨리 가르쳤던 이유는 본인이 하고 싶어 해서였다. 둘째는 학교에 갈 때가 다 되어 가는데, 앉아서 글자 배우는 일에는 영 취미가 없었다. 그래도 독일어 글자를 배우기 전,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한글을 가르쳐야 했다. 부담만 느끼며 시작을 못 하고 있었는데 코로나 덕분(?)에 집에 갇히게 된 것이다. 절호의 기회였다. 온종일 집안일과 아이들의 요구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 나는 의지가 없는 쪼꼬의 한글을 가르칠 여력이 없었다. 다행히 “안 되면 되게 한다”는 해병대(해병대 임을 밝힌 것을 알면 그리 달가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정신으로 똘똘 뭉친 남편이 강한 의지로 밀어붙여 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스스로 한글책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한 사람, 마빈!
첫째가 무엇을 해 냈을 때는 모든 게 처음이라 놀랍고 감격했고, 둘째는 첫째랑 다른 점이 신기하고 재밌었고, 막내는 마냥 어리게만 보여 모든 게 귀엽고 신통했다. 더해서 얘만 끝나면 육아의 어느 지점을 클리어하고 넘어간다는 ‘육아의 끝’ 바로미터가 되었다. 이전 록다운 기간에도 한글 쓰기를 하기는 했다. 형들이 공부할 때 할 게 없으니까 쓰고 싶은 글자를 얘기하면 엄마가 점선으로 글자를 써주고 점선 따라 한번 보고 한 획 쓰는, 시간 때우기용 미술 활동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래도 글자를 배워야 하는 쪼꼬보다 오히려 열정이 있는 편이었다. 다만 글자는 익히지 못하고 다시 유치원에 가게 되었었는데, 다시 록다운이 된 이번엔 입장이 좀 달랐다. 엄마 쪽에서 열정이 생겼다. 록다운 기간에 한글 공부를 하면 얼마나 효율적인지 이미 경험해 본 데다가 형들이 온라인 수업하고(학교 다니는 첫째와 둘째는 온라인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숙제하고 바쁠 때 하릴없이 혼자 집안을 휘젓고 다니다 결국엔 미디어로 향하는 이 아이를 좀 더 생산적인 방향으로 관심을 돌릴 의무를 느꼈다. 글자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한글이나 독일어나 마찬가지였다. 매번 “어, 아드리엘 할 때, A다!!! 하*(우리 집 아이들 이름에는 모두 ‘하'가 들어간다) 할 때 H다.” 하면서 독일어 알파벳을 읽기 시작해서, 마음이 조급해진 것도 있었다. 거기에 기름 넣고 시동 걸어 준 것은 정작 우리 집에 사는 인물이 아니었으니…
핑크는 뮌헨에 사는 친한 집 막내딸이다. 한국 나이로는 우리 집 막내와 같은 여섯 살이었지만, 개월 수가 10개월 정도 차이 나서 자기들끼리는 오빠, 동생으로 관계를 설정했다. 어느 날 핑크가 마빈을 오빠라고 부르길래 의아한 어른들이 물었다.
“핑크야, 왜 마빈을 오빠라고 불러?”
“마빈이 나보다 발이 크니까 오빠예요.”
오빠 셋에 고명딸인 핑크는 누구한테 지는 분도 아니시고, 누가 하란다고 하는 분도 아니시다. 그런데 동갑내기 친구한테 갑자기 오빠라고 부른다니까, 게다가 그 이유가 발 크기였다니까 어른들은 입이 함지박만 해져서 크게 웃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둘이 놀 때 마빈이 그러라고 했다는 것이다. 내가 너보다 발이 크다는 구체적인 이유를 대면서!
마빈을 오빠라고 부르는 절친 핑크는 쓰는 일에 푹 빠져 있다. 어디에 쓰느냐, 엄마 핸드폰 카톡 창에다가 쓴다. 나는 자주 간택을 입는 사람 중 하나였다. 엄마가 자주 연락하는 사람 중 하나여서. 시작은 카톡 보낼 사람의 이름을 쓰는 것이었다. 앤 이모, 나미 이모, 겨울 이모. 엄마가 핸드폰에 저장한 대로 보고 쓰는 거라 엄마보다 언니였던 나미 이모는 ‘나미!’ 하고 뜬금없이 동생이 반말로 부르는 카톡을 받았다고 한다. 특단의 조치로 엄마는 모든 이름에 ‘이모'와 ‘삼촌'을 붙였다.
그래, 이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자! 한국 나이 여섯 살, 때가 됐어!
당장에 여섯 살 아이를 가진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안 그래도 우리 애도 심심해하던 차였어.”
“형, 누나 공부할 때 자기도 얼마나 하고 싶어 했는지 몰라, 잘 됐다!”
“근데 얘네들이 모여서 공부가 될까?”
“그냥 놀 듯이 하는 거지 뭐!”
그렇게 모인 네 명이 마빈, 핑크, 통키, 티오였다. 둘째, 셋째, 넷째로 태어난 순서가 다른 듯 하지만 사실 모두 막내인 지라 엄마들의 기대치는 높지 않았다. ‘한글이 뭔지 정도만 알자.’ ‘낫 놓고 기역 정도만 알자.’ ‘즐거운 시간이나 보내렴.’ 막내를 향한 엄마들의 마음은 비슷했다. 큰 애 때는 그렇게 애를 태우며, ‘딴 애들은 이쯤이면 뒤집었던데, 얜 왜 아직 뒤집기를 못 하지, 옆집 애는 벌써 한글 떼고, 영어를 시작했다던데 우리 애는 뭘 시켜야 하나, 여섯 살이면 이 정도 말은 알아들을 거 같은데 왜 이렇게 말이 안 통하지.’ 하며 내던 조바심은 어느덧 사라지고 해탈의 경지에 들어서서 ‘때 되면 하겠지. 아이고, 이런 것도 할 줄 알아? 아직 아기인 줄 알았는데 벌써 많이 컸네!’로 바뀌었다.
첫 수업의 미션은 자기 이름과 친구 이름 알기!
한글 공부 처음 하는 애들한테 이름은 너무 어려운 미션인가 싶었지만, 이제 막 글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아이들은 자기 이름 정도는 알아맞힐 수 있거나 혹시 몰랐더라도 금방 익힐 수가 있었다. 아이들 이름이 어렵지 않았던 것도 다행인 지점이다. 만약 이름이 “권중혁”이나 “변혜림"이었다고 해보자 ㅝ나 ㅖ의 이중모음에서부터 막혔을 것이고 ‘가나다’도 익히지 못한 아이들에게 받침이 가득한 글씨는 비밀 암호처럼 보였을 것이다. 다행히 아이들의 이름은(여기에 쓰인 별명보다 실명은 훨씬 더) 쉬웠고, 유난히 “ㅏ"가 많이 들어간 덕분에 이름과 함께 모음 “ㅏ"를 배워볼 수 있었다.
“자, 선생님(분명 친구 엄마고, 내 엄만데 전혀 이질감 없이 선생님으로 받아들여졌다) 입 봐봐, 이렇게 크게 벌려서 아~~~~~~.”
아이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크게 벌려 “아”를 따라 했고,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크게 벌린 입에 사탕을 하나씩 넣어주고 싶었다. 사랑스러운 모습과는 별개로 여섯 살 아이들과 온라인으로 수업한다는 것이(게다가 천방지축 마빈을 옆에 두고) 만만치는 않아서 결국 한 사람이 수업 진행할 때 나머지 엄마들은 쉴 수 있을 것이라는 몽실한 기대는 허망한 것임이 드러났다. 결국 수업을 진행하지 않는 엄마들도 수업 시간 내내 꼼짝없이 아이들 옆에 붙어있어야 했다. 매일 한글만 가르치는 것도 무리라는 판단하에 하루는 한글 공부, 하루는 동화책 읽기로, 요일별로 엄마들이 돌아가며 하루씩 맡기로, 간략하지만 커리큘럼을 짰다.
그리하여 두 번째 수업에는 시덕 이모의 동화 구연이 시작되었는데, 주인공은 아주 심통 맞은 표정을 한 물고기 삐죽이었다. 삐죽이는 “나는 우울해, 나는 우울해, 나는 우울해.”를 삼단 저음으로 노래하고 다녔고, 아무도 못생기고 우울한 삐죽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반짝이 물고기를 만난 삐죽이는 삐죽 나온 자기 입이 뽀뽀를 위한 입이라는 것을 깨닫고, 우울해 대신 “사랑해"를 연발하게 되었다는 사랑스러운 이야기였다. 결론은 “사랑해"로 끝났지만, 시덕 이모의 실감 나는 삼단 저음에 빠진 아이들은 자꾸 “우울해"를 따라 했다. 아이들이 하는 우울해는 하나도 우울하지 않고 경쾌하기만 했지만, ‘어, 이게 아닌데?’ 싶은 마음을 뒤로하고, 동화구연이 아이들에게 먹혔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에 만족했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 기가 차게 눈치를 챘고, 엄마들은 점점 수업의 퀄리티를 높여가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동요 가수였던 나미 이모는 타고난 목소리를 활용해 아예 호비(어린이용 학습지에 나오는 캐릭터)로 분해 동화 읽어주는 영상을 만들었다. 제목만 들어도 재밌는 <글자 먹는 코끼리>, <변신 똥으로>, <뽕뽕 콧구멍>! 아이들의 집중도는 쭉쭉 올라갔다. 거기에 더해 함께 춤추기, 끝말잇기 등 나미 이모의 수업은 다양함과 즐거움의 요소를 쏙쏙 찾아서 진행되었다.
선생님마다 자기 스타일로 진행했기 때문에 수업에 연결성이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글자를 하나씩 익혀갔다. 순서대로는 아니지만 아, 가, 하, 소, 요, 코, 나, 다, 토마토, 오리, 모자, 오이, 우유, 요요, 나비. 아이들이 특히나 좋아한 글자는 아무래도 똥!이었다. 마빈은 똥을 똥으로 읽지 못해 자꾸만 응가라고 읽었지만(한 글자가 두 글자가 되는 매직) 어찌나 열성적으로 수업에 임했는지… 그 글자가 아주 인상적으로 뇌리에 박혔나 보다. 얼마 전에 또, 라는 글자를 어디에선가 보고는 “<응가>다!”외쳤다.
매일 자기 사진 밑에 쓰여 있는 이름을 보며 출석을 부르는 네 명의 아이들은 모두 자기 이름 정도는 읽고 쓸 수 있게 되었고, 친구 이름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소>라는 글자만 보면 소 티오의 소! 하는 아이들. 이 얼마나 관계 중심적이고 다정한 교수법인가!
시청각 자료는 아이들에게 필수적이었다. “모자”를 배울 때는 모자를 쓴 자기들 사진으로, “아빠”를 배울 때는 각자 아빠들의 사진으로, 눈코입을 배울 때는 얼굴에 눈, 코, 입 그림을 하나씩 채워가며, “바지"를 배울 때는 바지 입는 동화를 보며, 배웠다. 자기 얼굴이나 아빠 사진이 나오면 안 그래도 반짝거리는 눈동자들이 한층 더 빛을 냈다. 글자를 제대로 배우고 있는지에 대해 자주 확신이 안 섰지만, 아무튼 아이들은 그 시간을 매우 즐겼다! 한글에 관심을 갖게 해 주자는 목표는 기대 이상으로 달성해서 통키는 가지고 노는 모든 것으로 글자를 만들기 시작했고, 티오는 아주 성실하게 숙제를 했고, 핑크는 이전보다 더 많은 글자를 이곳과 저곳에 닥치는 대로 쓰기 시작했으며, 마빈은 아는 글자만 나오면 흥분하여 큰 소리로 읽으며 환희를 느꼈다.
가, 나, 다.
아야어여.
순서대로 배우며 체계를 잡아가는 한글 공부는 아니었지만, 노래와 동화, 놀이를 접목한 한글 공부는 나름의 순항을 하였다. 한글 공부의 예상치 못한 복병은 형제자매들의 지나친 관심이었다. 한글이라면 이미 뗀 지 오래인 형, 누나, 오빠들은 꼬마들이 한글 수업 시간만 되면 여기저기서 모여들어 제들이 더 열심을 냈고, 엄마들은 다른 기기로 연결해 주며 음소거를 풀면 강퇴라는 협박과 함께 한글 수업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긴 록다운으로 인해 종일 집에 갇혀 있어야 하는 아이들은 뭐라도 재밋거리가 있으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었고, 동생들의 한글 수업도 그중 하나였나 보다. 그나마 유일한 누나인 서희는 동생의 한글 수업에 도우미로 아주 큰 역할을 감당했고, 형, 오빠들은 뻔한 한글 자기가 대답하고 싶어 안달을 내면서도 퇴장당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마지막 수업과 졸업식
그렇게 매일 이어오던 한글 수업에 마무리할 시점이 왔다. 엄마들에게 구원과도 같은 소식, 드디어 록다운이 완화되어 아이들이 유치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소식을 듣고 마지막 한주,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수업에 괜히 욕심도 부렸다. 기회는 단 한 번인데, 아직 가르쳐야 할 것은 너무 많아서, 수업 시간은 자꾸 길어졌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지겨워하지 않고 끝날 때면 언제나 그랬듯 아쉬워했다.
진짜 진짜 마지막 수업은 앤서니 브라운의 <우리 엄마>, <우리 아빠가 최고야> 두 권이 교재였다.
책을 읽으며 우리 아빠는 어떤지 물어봤다.
아이들의 대답.
아빠를 안으면 방구 냄새가 나요.
난 아빠가 좋아요. 아빠를 안으면 따뜻해요.
우리 아빠는 수영도 잘해요!
(응? 너희 아빠 수영할 줄 몰라!)
우리 아빠는 춤도 잘 춰요!
(잘 추는 춤을 아직 못 봤구나…)
주어진 현실과 상관 없이 우리 엄마, 아빠가 최고인 아이들의 증언을 들으며 엄마, 아빠를 써봤다.
그리고 수업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글자를 배웠다.
사랑해.
친구들 이름 뒤에 ‘사랑해’를 붙여 보고, 엄마 뒤에, 아빠 뒤에 ‘사랑해’하고 써보는 아이들은 <ㅅ> 쓰기가 난해해서 끙끙거리면서도 사뭇 진지했고, 그 모습이 사랑 그 자체였다. 그날의 숙제는 예쁜 종이에 “**(자기 이름) 아빠 사랑해”를 써서 아빠 감동 주기. 편지를 받은 아빠들은 아이를 으스러지게 꼭, 아주 꼬옥 안아주었다는 후기가 들려왔다.
마지막 날엔 혜자 이모가 야심 차게 졸업식을 준비하였다.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넣어 만든 졸업장에는 아직 다 배우지 못한 가부터 하까지의 글자가 들어 있었다. 졸업장 전달식의 배경 음악은 위풍당당 행진곡. 아, 미국 졸업식에 자주 나오는 음악이다. 한글을 다 뗀 게 아니니 한글학교 중퇴 아니나며 농담을 하기도 했지만, 한글로 향할 수 있는 기반은 튼튼히 마련했다는 점에서 졸업, 이라는 이름에 모자라지 않았다. 졸업식에 함께 참석한 형제자매들은 동생들에게 꽃과 축하 편지를 전달하며 감격스러운 졸업식 분위기를 보탰다. 헌데 정작 졸업식을 준비한 혜자 이모네는 인쇄기가 고장이 났고, 티오는 친구들과 함께 졸업장을 받을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오후 혜자에게서 동영상 하나가 도착했다. 위풍당당 행진곡이 웅장하게 울려 퍼지고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아빠는 근엄한 표정과 목소리로 졸업장 전달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Ladies and gentlemen, today it’s my honor to present this certificate graduation of the Korean school… ”
아빠는 목소리 깔고 한껏 진지한데 애들은 “honor”에서부터 왁 웃음을 터트렸다. 티오의 아빠는 한국어 졸업식보다 영어로 진행되는 졸업식이 훨씬 익숙했고, 티오는 아빠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코만 파고 있다가 얼떨결에 졸업장을 받아야 했다. 졸업장을 받고도 티오는 아빠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게 뭐야?” 하며 의아해했다. 하지만 악수하려고 아빠가 내민 손엔 힘찬 하이파이브로 응대했다. 혜자는 자꾸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꾹 참으며 영상을 남겼고, 덕분에 그 순간을 전달받은 모두에게 웃음 바이러스가 번졌고, 코로나쯤은 가뿐히 이길 것만 같은 힘을 받았다.
그렇게 짧지만 진했던 아이들과의 한글 수업은 기억의 저편으로 넘어가고 아이들은 다시 독일어/ 영어의 세계 속으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그 진한 기억이 아이들에게 소중함으로 남아 유치원 안 가는 날이면 한글 공부 안 하냐고 묻고, 종이만 있으면 “** 사랑해”라고 쓰며, 아는 글씨에 다음 글씨를 더해 가고 있다.
*처음에 제목을 <꼬맹이들의 한글 공부>로 지었습니다. ‘꼬맹이'가 비하적인 표현이라는 사실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나 얼른 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꼬맹이>
명사
1. ‘꼬마’를 낮잡아 이르는 말.
* 표준 국어대사전
명사
1. 기본 의미 ‘어린아이’를 홀하게 이르는 말.
2. 키가 작은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
* 고려대 한국어대사전
결국 꼬맹이 대신 꼬마를 택했습니다. 아이들이 귀여워 쓰던 단어가 아이들을 낮잡아 부르는 말이었다니, 심지어 그 사실을 어디선가 읽었음에도 인지하지 못하고 계속 사용했던 것에 놀랐습니다. 부지 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소외시키고 홀대하고 있었는지 까마득하지만 작은 실천으로 오늘부터 꼬맹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주 작은 실천이 언젠가 세상을 바꿀 때까지. 천천히 조금씩이라도.
* 함께 해준 나미언니, 시덕, 혜자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 표지 사진 : Photo by Dave Weatherall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