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다 피지 않은 봄
Die Schublade
디 슈블라데
이 몽실몽실하고 달콤할 것 같아 보이는 단어는
실상,
장식보다는 수납이 중요한 보기에도 딱딱하고 각진 서랍장.
나에게는,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생이 슈블라데 같단 생각이 들었다.
몽글몽글한 희망을 붙잡고 앞으로 나가 보지만 부딪히는 것은 대게 딱딱하고, 거친 것들.
마음과는 상관없이 심미적인 것보단 실리적인 것을 선택하며 이어 붙여야 하는 나날들.
제 까짓 게 이뻐봤자 거기까지인 한계.
꽤 오래 자취를 감추었던 불면증이 다시 시작됐다. 아무래도 운동을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피곤한데 잘 수가 없어서 ‘글을 쓸까?’ 생각도 해봤지만, 어떻게든 자려고 눈을 감고, 다시 뜨고, 화장실을 들리고, 누웠다 일어나 물을 마시고, 다시 눕기를 반복했다.
내게 실리는 글이 아니라 잠이었기 때문이다.
내 글의 효용을 스스로 확신할 수 없어 오래 글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동안 아예 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띄엄 띄엄 쓰다만 글을 갈무리해 세상에 내놓을 명분이 내 안에 없었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누군가를 위해서도 무슨 소용이 있다고!
그런데 오늘 잠 대신 글을 선택할 수 있었던 용기는 친구의 응원.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데, 자주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닌데, 불쑥불쑥 그런 친구들이 한 번씩 나타나 준다.
“요즘은 글 안 써? 기다리고 있어.”
“니 글 대박 나라고 응원하고 있었지.”
주저앉아 있는 시간까지 응원해 주는 동쪽에서 나타난 귀인.
오늘을 충족하게 살기 위해서 나는 계속 글을 써야 할까? 답은 모르지만 내가 쓴 글을 향한 응원을 고마워하는 것 만으론 부족한 것 같아서 오랜만에 마무리를 작정하고 첫 단어를 써넣었다.
글을 올릴 생각에 주소창에 B를 쓰자 브런치가 아니라 어느 마트의 홈페이지가 떴다. 얼마 전에 마트 점원 구인을 보고 지원서를 냈었다. ‘일할 사람이 없어서 난리가 난 이 독일 땅에서 마트 구인의 면접은 명목상이 아닐까?’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깔끔한 옷, 오랜만의 화장, 시간 약속 지키기, 밝은 미소가 최선이었던 나의 독일 생활 첫 면접은 보기 좋게 떨어졌다. 최소한 독일어 시험 때 써뒀던 자기소개나, 지원서 쓸 때 썼던 문장 정도는 외워갔어야 했는데, 맘만 어수선해서 덜렁덜렁 시간을 보내곤 무방비로 독일어 첫 면접 앞에 섰다.
생각해 보면 면접에서 떨어진 거 처음이었던 거 같다. 고등학교, 대학교, 알바, 알바, 직장, 다시 직장.
내 낙방의 기록은 아무래도 독일어에 방점이 있는 것 같다. 독일어 시험, 독일어 면접.
척척 붙여준 면접 운은 모국어 한정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새해 계획도 없이 나름 열심을 내서 독일어 공부를 했다.
아이들 클 때까지만 여기 산다고 해도 아직 12년. 막내가 김나지움을 안 가고 일찍 독립한다면 10년 이내?
짧아도 10년은 여기서 더 살아야 하는데, 언어 때문에 인간 구실 대강 포기하고 사는 건 아닌 거 같아 마음을 다잡았다. 아이들도 클 만큼 컸고, 좋은 구실이었던,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코시국도 어느새 막을 내렸기 때문에 더 이상은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싫어도 꾸역꾸역 강의를 듣고 앱을 켜서 XP를 쌓아 올리고 잘 알아들을 수도 없는데 독일어 팟캐스트를 켜고, 단어를 찾고, 쓰고 저장하고, 들여다 보고.
다음 레벨의 독일어 수업을 등록하기 위해 독일어로 몇 번이나 이메일을 쓰고, 몇 번이나 통화를 해서 Berechtigungsschein이라는 것을 받아내고 또 몇 번의 이메일과 통화와 몇 번의 방문을 했다. 과정이 복잡했던 만큼 선택의 여지가 없이 등록 가능했던 수업을 받아 들고 감지덕지했다.
나의 슈블라데는 그런 것들이다.
잠. 절룩거리는 외국 생활의 언어. 40대에도 계속하고 있는 진로 고민.
친절한 말 한마디와 잠깐 건넨 미소와 화답.
아이들이 선물한 사랑스러운 순간들과 그보다는 훨씬 잦은 잔소리들.
기우뚱 대고 가라앉아 있어도 기다려 주는 고마운 이들과 알지도 못하면서 찔러대는 손가락들.
학교와 다양한 기관들에 써야 하는 이메일과 지친 하루 끝에 드러누워 시청하는 드라마.
그 사이 어딘가.
슈블라데의 몽실한 발음과 특별할 것 없는 그 의미.
지난해는 가을부터 겨울이었다. 여름의 한국행에서 힘을 받아왔어야 했는데, 끈적끈적한 한국의 여름이, 집 없이 전국을 떠도는 한 달 열흘이 내게는 고단하고 지난했다. 좋은 사람들 그리웠던 이들을 만날 수 있었으니 귀한 시간이었지만, 그마저도 도장 찍기 하듯 깊은 대화도 없이 그냥저냥 스치고 지난 것 같아 아쉬움이 남았다. 여름은 개미처럼 꿀벌처럼 식량창고에 잔뜩 잔뜩 쌓아둬야 하는 시간인데 그렇게 소비하고 나니 식량고가 텅텅 비어버렸다. 그렇게 가을부터 내내 쫄쫄 굶으며 이른 겨울잠을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에너지가 없을 때 안으로 안으로 굽어 들어가는 사람이라는 걸 여기저기 광고하고 다닐 수도 없어서, 그냥 무심한 사람으로 노선을 정하고 몇 개월을 지났다.
유난히 길었던 그해 겨울,
이 노래가 떠오르는 걸 보니 봄이 오고 있구나.
어느 한 해 길지 않았던 겨울은 없었지만 8월부터 겨울이었던 건 좀 아니지 않았을까.
240일..
아직 1년을 채우려면 125일이 남았으니까, 엄청 오래 주저앉아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그동안 꾸준히도 “작가님" 하고 부르며 나를 찾았던 브런치(의 시스템일까..?)에게 변명을 하려다, 사실은 슈블라데를 나름 정리하고 차곡차곡 채우느라 그랬다고 변명을 바꿔 봤다.
변명은 die Ausre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