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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의 Feb 22. 2022

방전

슈퍼우먼의 내려놓음 연습

책장에 처박아두었던 스케줄러를 다시 꺼냈다. 도저히 하루 24시간 안에 우겨넣을 수 없는 일들을 벌려놓고 맨날 헉헉대는 나 자신이 버거워서다. 그렇다. 해야하는 일들이 버거운 게 아니라, 그것들을 다 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내가 너무 힘들다. 새벽에 일어나면 글을 쓸까 운동을 할까 고민하느라 시간을 보내고, 업무 시간에는 갑작스레 밀려오는 일에 정신이 없고, 저녁에는 지친 몸으로 아이들과 부대끼다 이것도 못했네, 저것도 못했네, 일찍 자야되는데 전전긍긍하며 쓰러져 잠드는 일상이 좀 지겹다. 그 여파로 아이들과 남편에게 튀는 피곤과 짜증의 불똥도 싫다. 나도 그냥 좀 심플하게, 가볍게 살고 싶다. 뭔가를 해내는 데서 오는 성취감 말고 소소한 행복에 젖어보고 싶다. 아무것도 안 해도 마음이 편안하고, 그저 흘러가는 시간을 즐기는 여유를 갖고 싶다. 언제쯤 가능할까? 가능하긴 한 걸까?


결론을 먼저 예측해본다면,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아무것도 안 하고 늘어져있는 걸 견디는 게 더 스트레스일테니까. 해야되는 게 많고, 다 잘 해야해서 스스로를 달달 볶는 건 내 천성이다. 중요한 걸 잃지 않으려면 내려놓아야 한다는 걸 아주 잘 알지만, 내려놓는 법을 도무지 모르겠다. 그냥 안 하면 되는건가? 중요한 것만 남기고 다 버리라는데, 버릴 게 없으면? 다 중요하면? 일, 건강, 아이들, 글쓰기, 공부, 다 중요한데 무엇을 버리라는 말인가. 버릴 것을 찾는 게 더 어려우니 결국 포기하고 다 움켜쥔다. 스케줄러에 빽빽하게 집어 넣으면서 이미 직감한다. 오늘도 다 못하고 찜찜하게 잠들겠구나. 마치 거대한 바위를 굴리는 시시포스처럼, 스스로 만들어 낸 삶의 무게에 짓눌리는 느낌이다. 


자, 그만하자. 나는 왜 이럴까 자책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방전된 내게 필요한 건 에너지다.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이 억지로 내려놓으려고 애쓰는 것 보단, 최대한 많은 것들을 해낼 에너지를 채우는 게 더 효율적일 것 같다. 내게 에너지를 주는 것들을 생각해본다. 아이들, 글쓰기, 공부, 운동... 일. 

맙소사. 다 너무 중요해서 내려놓지 못했던 내 무거운 바윗덩어리들이 사실은 내 에너지였다...! 이러니 도무지 뭐 하나도 포기를 못하지. 아니, 사실 포기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내 삶을 굴러가게 하고, 내게 힘을 주는 것들을 나는 어떻게든 해내며 살고 있었던 거다. 그러다 최근 과부가가 걸렸다. 아이가 곧 입학하고, 책 투고를 하고, 조직개편을 앞두고 있으며, MKYU에 입학했으니. 각각의 에너지원이 저마다 최대치의 충전을 요구하니 과부하가 걸릴 수 밖에. 원래 성격도 좀 피곤한 건 맞지만 지금은 상황마저 역대급이다. 작년 말부터 이랬다. 회사는 어수선하고,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크고, 나 역시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 바이러스와 남편의 휴직도 한 몫 한다. 불확실성의 끝장이다. 그저 내 일상을 흔들리지 않게 끌고 가는 것만도 벅찬 나날들이다. 아마 앞으로 당분간은 이럴 것이다. 그러나 이게 당연한거라고 계속 헉헉댈 수는 없다.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데 100미터 경주하듯 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금방 나가떨어질 테니까. 슈퍼우먼 콤플렉스라고 진짜 슈퍼우먼은 아니니까. 오래 달릴려면 페이스를 조절해야 한다. 전력질주하는 구간과 조금 천천히 달리는 구간을 나누어야 한다. 중간중간 물도 마셔야 한다. 끊임없이 호흡을 가다듬어야 한다. 잠시 숨을 고르고 생각해본다. 어제까지 내게 힘을 주었던 것들이 왜 오늘은 버거울까. 무거운 바윗돌을 감싸안고 나는 왜 이렇게 아등바등할까. 이것들이 다시 내게 힘을 주는 에너지가 되려면 나는 무엇을 바꿔야만 할까. 내 삶의 바윗덩어리이자 에너지원들은 저마다의 속도와 무게로 충전과 방전을 거듭하며 굴러가고 있다. 일은 일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글쓰기와 공부도 그렇다. 너무 좋았다가 너무 힘들었다가, 잘 되다가 말다가를 반복한다. 건강도 마찬가지다. 신경쓰면 좋아졌다가 방심하면 금방 바닥을 드러낸다. 문제는 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방전될 때다. 전부 다 급하고 중요한 것들이니 빨리 에너지를 채워야 하는데, 동시에 하려니 속도가 안 난다. 발만 동동 구르고 안달복달 한들 소용이 없다. 급한 마음에 여러개를 꽂아 동시에 충전하다 보면 과부하가 걸린다. 결국 고장난다. 딱 지금 내 꼴이 그렇다.


그래, 한꺼번에 방전되지만 않으면 된다. 내가 할 일은 그것이다. 한 번에 하나씩, 방전되기 전에 한 가지씩 돌아가며 충전하는 것. 요즘처럼 내 모든 삶의 영역이 0순위에서 아우성을 칠 때도, 결국 한 번에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아이의 입학식에 참석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조직장과 인사를 나눌 수는 없는 일이다. 글을 쓰면서 운동할 수 없고, 스피치 강의를 들으며 심리학 공부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모든 걸 하루에 다 1/n로 쪼개 넣은들 이도 저도 안 된다. 서로의 에너지를 잡아먹으며 더 빨리 방전될 뿐이다. 


나는 내가 에너자이저인 줄 알았다. 뭐든지 다 할 수 있고, 뭐든지 잘 해야만 하는 슈퍼우먼이라고 생각했다. 진짜 슈퍼맨, 슈퍼우먼은 자신이 다 해내야만 한다는 책임감에 더해 실제로 그걸 해낼 능력 또한 가지고 있기에 슈퍼 히어로가 될 자격이 있지만, 나는 아니다. 전부 잘 해내야만 한다는 강박만 있을 뿐 실제로 모든 걸 다 해낼 능력도, 체력도, 시간도 없다. 무엇보다 그 모든 걸 '기쁘게' 해낼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게 없는 사람은 결코 슈퍼 히어로가 될 수 없다. 나만 그럴까? 현실 세계에 과연 진짜 슈퍼우먼이 있을까? 모든 것들을 거뜬히 해내면서도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만약 있다면, 한번 물어보고 싶다. 어떻게 관리하냐고. 쉼 없이 샘솟는 에너지와 시간, 그리고 감정들을. 

   

슈퍼우먼이 되고 싶은 나같은 일반인에게는 에너지 관리가 곧 삶의 질이다. 에너지가 바닥나면 세상이 다 무너진 것만 같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그런 나를 못 견디기에 더욱 괴롭다. 그렇게 되기 전에 수시로 관리해야 한다. 적당히 조금씩 충전하며 일상을 잘 굴리는 게 목표다. 가끔은 어느 하나가 최대치의 에너지를 요한다. 그럴 때는 다 제쳐두고 그 녀석을 돌봐야 한다. 김미경 강사의 말을 빌리면, 하루 중 가장 비싼 시간에 그 일을 한다든지, 그걸 해냈을 때 나 자신에게 보상을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다. 생각보다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아마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몰입'이 아닐까 한다. 고속 충전기를 꽂듯, 가장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을 찾아 오늘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하는 것. 그것을 해냈을 때는 다른 모든 걸 못했더라도 기뻐할 것. 단 한시간, 아니 단 5분이라도 고속 충전의 충만한 기쁨을 만끽하면 좋겠다. 그것이 내게 하루를 살아낼 에너지가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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