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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 Sep 14. 2021

8. 꿈에 그리던 미국행 비행기

나는 왜 그렇게 미국이 가고 싶었을까?


주재원 합격 그리고 신체검사와 영어수업이 끝나고 나니 마지막 과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비자'.

확실한 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절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얘기와 한번 거절을 되면 정말 힘든 앞날이 기다리고 있다는 총무팀의 말에 더더욱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이든 정부가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코로나임에도 비자 발급이 원활히 진행된다는 소식을 들어서 빠르게 서류를 준비하고 비자 인터뷰를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추웠던 2월 대사관 앞에서 남편과 손을 잡고 벌벌 떨다 들어가 성공적으로 인터뷰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의 마지막 관문이었던 인터뷰도 끝이 났고 시간은 흘러 짐도 부치고 출국 날짜를 하루하루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American dream

'미국'은 저에게 꿈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저는 그렇게 미국을 열망하게 되었을까요?

*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아빠의 큰고모는 아빠가 중학생 때 시기로는 1970년대 초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습니다. 그 후 성공적으로 적응을 한 고모는 자식들 교육을 위해서라도 이민을 오라며 형제들에게 초청을 했습니다. 그 당시 은행에 다니고 있던 저희 할아버지는 "내가 굳이 미국에 가서 고생을 뭐하러 해."라고 하며 미국행을 거절하셨습니다. 당시 아빠의 누나이자 저의 고모는 며칠을 울며 할아버지의 마음을 돌리려 했으나 실패했고, 할아버지의 형제 중 저희 가족만 한국에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저희 아빠도 그 얘기를 여러 번 저에게 한 것은 보면 아빠도 그 상황이 아쉬웠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그 후 10년이 지나 제가 태어났고, 아빠의 형제들이었던 큰아빠와 고모도 결혼을 하여 저에게는 사촌들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저희 가족은 외국 생활을 할 운명이었던 것일까요? 저는 5살 때 말레이시아에 가서 초등학교 2학년 때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사촌오빠는 공부에 뜻이 있던 큰아버지를 따라 1살도 되지 않아 미국으로 떠났고, 사촌동생들은 건설회사에 일하시는 고모부를 따라 전 세계를 돌아다녔습니다. 더 신기한 것은 외가 친척도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큰 배의 선장님이셔서 한번 나가시면 몇 개월씩 한국에 안 들어오셨고, 큰삼촌도 교환교수로 몇 년 미국에 나가 계셨습니다. 또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형제들 역시 일찌감치 미국 이민의 길을 떠나 한국에는 몇 분 남아 계시지 않았습니다. 집안 분위기가 그렇다 보니 명절이라고 하더라도 저희 가족에게는 특별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 있는 사람들끼리만 모이는 것은 불편했는지 그것도 가끔이었고, 만나더라도 한 끼 외식을 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주변 친구들은 시끌벅쩍한 명절을 보내고 오고, 뉴스에서도 그런 모습을 많이 보여주어 어린 나이에 참 외로웠고 티비에 나오는 오손도손한 친척들을 볼 때마다 부러웠습니다.


그 후 초등학교 고학년 때 한국에 온 사촌오빠와 사촌동생 들와의 첫 만남은 참 이질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영어로 대화를 하였고, 흔히 한국 청소년들이 하지 않는 게임을 하고, 노래를 듣고,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처음 이민을 가신 후 사업으로 큰 성공을 하신 아빠의 큰고모는 한국에 오실 때마다 저희를 위한 선물을 잔뜩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런 경험들로 저는 어렴풋이 '미국은 멋진 곳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저의 중학교 생활은 매우 다이내믹하였습니다. 꽤 좋은 성적으로 입학했던 중학교는 심한 사춘기를 겪으며 공부를 멀리 했고 연예인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선생님들을 참 많이 괴롭혔습니다. 엄마가 자주 학교에 그리고 학원에 불려 다녔습니다. 그때 아빠는 한국에서의 제 미래가 걱정이 되었는지 어디로든 당장 갈 수 있는 곳을 찾아보았고, 그렇게 갑자기 브라질로 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브라질에서 갔던 곳은 작은 국제학교도 없는 소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아시아계 (일본계) 사람들이 많아 안전하고 평화로운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현지 학교에 입학을 하여 포르투갈어로 공부해야 했는데 그것이 참 힘들었습니다. 당시 아빠는 저의 미래를 걱정하며 '희소성' 이 강점이 될 수 있다며 끊임없이 저에게 "포루트갈어만 잘해도 먹고 사는 데는 문제없을 거야. 열심히 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비해 너무 여유가 많았던 것이 이유였는지 저는 생각이 많아졌고, 브라질에서의 저의 미래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미국으로 보내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때 아빠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아빠는 너를 위해 지금 하던 것을 포기할 생각이 없고,
너만 미국에 보내줄 능력은 안돼


저희 부모님을 무척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지금 돌이켜 봤을 때 아쉬웠던 것 하나를 뽑자면 아빠가 저에게 저렇게 얘기한 것입니다. 어른이 된 지금 부모님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다 미국에 있는데 왜 나만 갈 수 없는 것일까?"라는 원망이 많이 들었고 미국에 대한 이유 없는 로망이 더욱 커지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가지 못하는 저는 차선책으로 한국으로 돌아왔고 한국에 돌아와서부터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저 학교, 학원, 독서실의 연속이었고 그렇게 대학생이 되었고, 그 후에도 학교, 독서관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후 교환학생으로 미국을 다시 노려 보았지만, 2 지망으로 썼던 독일에 선정이 되어 미국으로의 교환학생 꿈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졸업 후 유학을 가겠다고 한번 더 미국행을 꿈꾸었지만, 그때도 아빠는 "아빠는 유학 비용 지원을 안 해줄 건데 너 혼자 비용을 부담할 수 있겠어? 그리고 유학까지 다녀와서 네가 하고 싶은 것이 뭐야?"라고 물었고, 그 질문은 충분히 힘들었던 유학 준비의 의욕을 꺾었고, 도대체 미국이란 곳은 어떤 곳 이길래 아빠는 나에게 그렇게 부정적인 아웃풋을 주는 것인지 의문이 생기며 미국에 대한 두려움마저 생겼습니다.


그렇게 미국에 대한 꿈과 로망은 겹겹이 쌓여만 갔지만, 저의 용기는 그 한계의 벽을 넘지 못했고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가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항상 마음속 깊이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꼭 미국에 가겠다.




누구에게도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저는 내년 첫째의 초등학교 입학에 맞춰 미국에 가야겠다는 로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준비는 없었고 지금까지처럼 '로망으로 끝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저의 간절함을 하느님도 알아주셨는지 저의 약 20년이 넘는 로망이 드디어 실현이 되는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출국날 비행기 탄다고 신난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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