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습관처럼 하는 말이 아냐
코로나 사태의 심각성이 불붙었던 2020년 1분기, 약국에서 매출이 증가한 제품군들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타이레놀이다.
많은 분들이 상비약의 기본인 해열진통제로서 타이레놀을 구비해 두고 있다.
물론 타이레놀 외에도, 최근 '코로나 응급 대처약', '코로나 예방약' 등의 말도 안되는 허위정보로 인해 (S의대 카톡방에 나온 얘기라는 허위 사실이 떠돌아다니는 황당한 해프닝이 있었다) 타이레놀 + 아스피린 + 애드빌 삼총사의 판매량이 훅 늘었다. 아스피린은 한동안 품절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기본적인 해열진통제 및 소염진통제의 역할을 할 뿐이지 코로나의 예방과 치료에 있어 검증된 아무런 데이터도 없다.
너무 친숙하지만, 그래도 한번 찬찬히 살펴봅시다: 타이레놀
타이레놀의 성분은 아세트아미노펜(acetaminophen)으로,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파라세타몰(paracetamol)이라는 성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AAP라는 약자로도 많이 쓰인다. 아세트아미노펜 성분을 가진 약품으로는, 국내의 경우 한국얀센에서 제조/판매하는 '타이레놀(500mg)', '타이레놀 ER(650mg)', '펜잘이알(650mg)' '트라몰정' 등이 있다. 한국인의 두통약 게보린에도 아세트아미노펜 성분이 한 알에 300mg 함유되어 있다. 이 포스트에서는 아세트아미노펜을 그냥 타이레놀로 지칭하도록 하겠다.
타이레놀의 기전은 최근까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가, 2000년대 초반에 들어와 뇌에 주로 위치한 'COX-3'이라는 염증 매개 물질의 합성을 억제하여 해열, 진통 작용을 나타낸다는 것이 현재까지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말초 신경에 존재하는 COX-1, COX-2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아 소염작용이나 위산분비촉진 등의 작용은 하지 않는다.
참고로, 아세트아미노펜의 대표적 브랜드인 얀센 사의 타이레놀은 '타이레놀 콜드에스' '우먼스 타이레놀' 및 소아용 타이레놀 등 여러가지 제품 라인을 가지고 있는데, 우먼스 타이레놀의 경우 붓기를 동반한 생리통에 효과가 좋은 파마브롬이라는 성분이 함께 들어 있으며, 타이레놀 콜드에스의 경우 아세트아미노펜 325 mg에 더하여 콧물, 재채기, 기침, 목이 부은 증상 등을 완화시켜주는 약제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어 기본적인 종합감기약으로 복용할 수 있다.
(+참고로, 배가 꼬이듯이 경련성 통증을 수반한 생리통에는 부스코판 플러스라는 약을 복용할 수도 있다. 부스코판 플러스에도 아세트아미노펜 500 mg와 스코폴라민이라는 진경제가 함께 들어 있으며, 두알씩 복용한다. 다만 생리통은 기본적으로 염증성 물질에 의한 통증이기 때문에, 이부프로펜과 같은 NSAIDs 계열의 소염진통제를 복용하는 것이 우선이다.)
흔히들 타이레놀을 재구매하실 때에 '그때 먹었던거 빨간포장으로 된거~' 라고 얘기하시는데, 타이레놀은 기본적으로 포장에 모두 빨간색이 들어 있다...ㅠㅠ 일일이 꺼내서 보여드리면 보통은 타이레놀 500 mg (코카콜라 화이트/레드 조합)을 고르시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보통은 타이레놀 500 mg 제품에 익숙하시다. 참고로 타이레놀ER은 노랑/빨강 조합이고 우먼스는 보라색/빨간색, 콜드에스는 파란색/빨간색 조합이다.
그럼 '타이레놀ER'은 일반 '타이레놀'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바로 약물의 방출 및 지속시간과 관련되어 있다. 타이레놀 500 mg은 속효성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복용하고 1시간 이내에 약물 혈중 농도가 피크를 치고, 4시간 정도의 약효를 유지한다. 그 후 다시 혈중 농도가 낮아져 그때 그때 다시 복용을 해 주는 것이 좋다(1일 8정 이내).
한편 타이레놀 ER이나 펜잘 ER의 'ER'이란 extended release의 약자로, 약물이 천천히 몸 안에 퍼져 약효를 오래 유지한다고 생각하면 쉽다. 타이레놀 ER의 경우 2-3시간에 걸쳐 약물 농도가 천천히 높아진 후 8시간동안 높은 혈중농도를 유지하며 약효를 지속적으로 유지한다. 지속적인 통증이 있거나 있을 것으로 예상될때에는 타이레놀 ER정을 복용해 주면 일과 중에 특별한 지장이 없이 통증을 억제해 줄 수 있다.
한줄 요약: 그냥 타이레놀은 빠르고, 타이레놀 ER은 오래 간다!!!
타이레놀은 1일 복용 가능한 최대 용량이 4,000 mg으로, 500 mg 짜리 타이레놀 8알에 해당하고, 650 mg 기준으로 생각하면 6알 이내로 복용해야 하며, 두 알 이상을 한번에 먹는 것은 권장되지 않는다. 상한선이 4,000 mg 이기는 하지만 약국에서 복약지도를 할때에는 500mg정은 가능한 6알 이내에서, 650 mg정은 4알 이내에서 복용하시라고 한다.. 그 정도로 안잡힐 통증이라면 다른 마약성 진통제 또는 마약류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서로 너무 지겨운 말이지만 지켜 줍시다. 타이레놀 x 술 = 간독성
타이레놀 제제에 대해 복약지도 할때,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지겨울지 모르지만 꼭 하는 말이 있으니
"복용한 날 술 드시지 마세요!"
"술 드시고 복용하지 마세요!"
"술자리 피해 주세요!" (여기에 반드시 세트로 돌아오는 답변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아 오늘 꼭 마셔야되는데.......그럼 오늘 약을 먹지 말까요?)
"약주하시지 마세요!" (for 연세 지긋하신 아버님들)
"지금은 드시지 마세요!"(for 술먹고 약국오신 분)
지겨울까봐 좀 베리에이션을 줘보기는 하지만 어쨌든 요지는 약이 술과 만나지 않게 해 달라는 거다.
참고로 술 먹지 말라는 대표적인 약이 진통제인데, 타이레놀의 경우 "간" 때문에 그렇고, 이부프로펜, 덱시부프로펜, 나프록센 등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NSAIDs)의 경우 "위"때문에 걱정돼서 그렇다.
타이레놀과 술이 만나면 간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렇게 술술술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할까?
타이레놀, 그러니까 아세트아미노펜이 체내에서 할 일을 다 하고 나면 배설이 되어야 하는데,
대부분은 몸에서 알아서 아세트아미노펜을 글루쿠로나이드(glucuronide) 및 설페이트(sulfate)라는 물질이 알아서 내보내도록 맡겨 두지만, 아세트아미노펜 중 일부는 간에서 CYP2E1라는 효소에 의해 대사되어 구조가 약간 다른 N-acetyl-iminoquinone이라는 중간물질로 변하게 된다.
이 대사체들은 글루타치온(에바치온이라는 이름을 가진 약으로도 판매된다..숙취해소세트에 간혹 함께 들어 있다) 에 의해 포합되어 배설되는데, 글루타치온이 충분하지 않거나 감당할 수 없는 정도로 대사체의 양이 많아지게 되면 배설되지 않고 간에 남아 간독성을 일으키게 된다.
그럼 대사체가 어떤 경우에 많아질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CYP2E1라는 효소가 정상적인 농도로 있으면, 딱 적당한 만큼만 대사체가 생길테고 그럼 몸 안에 글루타치온이라는 애들이 이 대사체를 감당할 능력이 되니 알아서 잘 배설을 시킬텐데, 술을 먹으면 간에서 CYP2E1 효소가 그 이상으로 불려나오게 된다. 그럼 그냥 배설될 수 있었던 아세트아미노펜들도 이 CYP2E1에 의해 얼떨결에 다들 대사가 되어버리면서 이 N-acetyl-iminoquinone이라는 간에 독성을 가진 대사체들이 과하게 많아지고, 글루타치온이 충분치 않아 배설을 못시켜서 간에 쌓이고, 이로 인해 간독성이 유발된다.
한줄 요약: 술과 타이레놀이 몸 안에서 만나면 타이레놀이 독으로 변한다!!!!!
그러니 복용한 아세트아미노펜이 몸에 남아 있는 동안 술을 마시는 것도 안되고, 술을 마셔서 몸에 CYP2E1이 많아진 상태에서 술을 마시는 것도, 하지 말라는 거다.
아세트아미노펜 중독이 심할경우 사망에 이르기도 하고, 간이식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물론 이런 위험은 간에 기저질환이 있었던 사람에게서 더 가능성이 높을테지만, 스스로 위험이 있는지를 모르는 경우도 있을테니 항상 조심하는 것이 좋다.
여기부터 B급 잡설: 타이레놀 x 술의 추억
그런데 약사라고 해서 항상 약 복용시 주의사항이나 용법/용량을 다 지켜 먹지는 않는다... 그러지 못할 상황도 많기 때문이다.
잠시 추억에 젖어보자면... 때는 바야흐로 2012~2013년.
지방에서 근무하고 있었지만 홍대 라이브클럽병에 걸려 있던 나는.. 퇴근 후 시외버스를 타고 반포고속버스터미널에서 9호선 급행타고 당산가서 홍대입구역 가서 놀다가 밤새 술먹는 것이 삶의 낙이었던 나는.. 신나게 놀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위치는 홍대, 시간은 11시가 넘어 있고 반포 고터 막차는 11시 반이었으므로 이미 집에 갈 방법은 사라졌고 난 이미 틀렸어 하고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가 잠깐 잠들었다가 일어나면 감자탕 집 아주머니가 서비스로 뜨끈하게 들깨 뿌려 부쳐주신 계란후라이가 어김없이 눈앞에 있었고 그걸 한장 먹고 술집에서 나와 고속터미널로 가곤 했다.....지금 생각하면 망나니 같다....그래도 아직 새벽 네다섯시가 채 안된 경우가 많았는데, 그럴때면 고속터미널 경부선에서 호남선 가는 길에 있었던 24시간 찜질방으로 가곤 했다. 따뜻하고 조용하고 아늑했고 시설도 괜찮았었다..가끔 자정에서 한시 정도로 일찍 도착한 때에는 영화관(당시 시너스)에서 심야 영화를 보기도 했다. 컨져링을 고터에서 심야로 봤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술이 약간 깰랑말랑했을 때에 찜질방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혈압과 맥박 조절이 잘 안될뿐 아니라(그래서 심장 안좋으신 분들이 술드시고 사우나 하시다가 사망하시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음주 후에 몸 안에 남아 있던 열이 나가지 못하고 계속 몸 안에 남아 있게 된다.
그리고 높은 온도 안에서 알콜 대사가 더 빨라지면서 숙취를 일으키는 물질이 급속도로 생성되어 버리니,
열과 숙취가 아주 화악 올라온다. 내 경우에는 사우나에서 나오고 난 뒤 1-2시간 이후에 더더욱 그러한 증상이 심했다. (절대!!! 절대 술먹고 사우나 가지 마세요!! 死우나라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닙니다!!)
문제는 그게 출근한 이후의 시간대였다는 것이다.
출근을 했는데 애가 얼굴이 발그레하고 뜨겁고 머리도 아파하는 것 같으니, 다른 선배 약사님들은 매번 근심어린 표정으로 친절하게 내 손 안에 타이레놀을 쥐어주고 물 한컵을 들려주곤 하셨다...그리고 그해 건강검진 때 간수치가 좀 높다는 얘기를 들었다..
사실, 간이 건강한 사람이 어쩌다 한번 술 적당히 먹고 타이레놀 먹는다고 해서 당장 큰일이 나지는 않겠지만
언제든 위험요소는 자신도 모르게 있을 수 있고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상반응)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주의해야 하는 사항들은 꼭 지켜주시는 것이 좋다.
쓰고 나니 갑자기 그때의 젊었던 내가 그립다.
당시의 나는 결국 홍대병이 도져서 고향을 떠나 홍대 근처의 마포구 소재 한 제약회사에 취직했다가 과한 업무에 시달리느라 오히려 홍대는 더 못 가게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