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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주 Oct 03. 2019

질문은 돌고 돌아

생식기 03.

아직도 기억이 난다


2005년 더위를 목전에 둔 어느 날, 나는 엄마의 성화에 못이겨 동네 한의원을 찾았다. 당시 나는 지역방송국에서 하고 있던 TV프로그램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가 새로운 프로그램을 하고 싶던 참이었다. 엄마 품을 떠나 서울에 가서 살 참이면 한약을 한 재 먹고 건강한 몸으로 올라가라는 것이 엄마의 특명이었다. (왜 부모님들은 한약이 만병통치약이라 생각하는 것일까). 한약을 먹으면 덩달아 끊어야하는 음식이 많으니 투덜투덜 하면서도, 이렇다 할 반박은 하지 못했다. 더구나 방 보증금을 쥐고 있는 분의 어명이니 들을 수밖에.     


당시 엄마가 추천했던 한의원은 시골 동네에서는 흔치 않게 초음파기기를 보유하고 있던 곳이었고, 진맥과 동시에 복부 초음파도 기본으로 봐주는 상당히 독특한 한의원이었다. 지긋이 손목을 누르던 한의사는 그 때까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다가 “자, 누워볼까요”하고는 초음파기기 앞에서 인상을 찌푸렸다. “배에 혹이 큰 게 있는데 알고 있어요?” 그리고 점점 빨려 들어가듯 초음파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모습이 생각이 난다. “빨리 큰 병원 가야겠는데. 이거, 임신 못해.”       


그 때 내 나이가 스물넷. 한의사의 몇 마디 가운데 특히나 나를 요동치게 만들었던 말은 “임신 못해”였다. “안녕히 계세요” 꾸벅 인사하고 돌아 나와 집으로 가는 길, 내내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것도 모자라 일하러 간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펑펑 울고, 별로 친하지도 않은 오빠를 붙잡고 또 울었다. 우스운 사실은,  임신 못한다는 사실이 소문이 날까봐 친구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때 나는 왜 울었을까? 왜 그렇게 숨겼을까? 남자친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결혼은 더더욱 먼 일이었는데.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말은 나에게 왠지 모를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생애 첫 번째 수술을 했다. 자궁과 난소 사이에 비집고 자란 혹은 12cm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같은 때라면 복강경이라는 수술법으로 배에 구멍만 한두 개 내고, 혹을 조각조각 내어 꺼내는 방법을 썼겠지만, 그때만 해도 참으로 옛날이었다. 아이를 천 명 넘게 받아봤다는 백발의 산부인과 의사는 다행히 실력이 좋았다. 혹은 꼭 혹 크기만큼의 수술 자국을 남기며 내 배에서 빠져나갔다. 배에는 양끝이 올라간 입술처럼 둥근 반원 자국이 남았다. 당초 한의원에서 “임신 못해” 말한 것은 혹의 위치가 좋지 않아 자궁 또는 난소까지 함께 떼어내야 할까봐 했던 말이었고, 다행히도 나는 어떤 장기도 떼어내지 않고 첫 수술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이후 겪은 항암치료는 논외로 하고.


문득 걱정이 됐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의문이 드는 지점은 그것이다. “임신 못해”라는 말에, 어린 나는 뭘 그렇게 서럽다고 울었을까? 평소 아이를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고, 오히려 따지자면 아이를 싫어하는 쪽에 속하는데. 기본적으로 성악설을 믿고, 내 유전자를 세상에 남기는 것도 그리 탐탁치 않아 했으면서, 그럼에도 나는 왠지 모르게 서러웠다. ‘여자가 아이도 못 낳는다니!’     

 

‘칠거지악’이라는 말을 다들 몇 살 때 쯤 배울까? 기억을 돌이켜보면 중학생 때였는데, 문학인지 국어 시간에 들었던 것 같다. 칠거지악,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일곱 가지 이유. (좀 웃자).      


여자라면 무릇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의무요, 큰 기쁨일지니. 놀랍게도 그 때의 나는 그 의무와 기쁨을 당연사항으로 생각하고 살았던 것 같다. ‘딸 하나, 아들 하나’ 누군가와 새끼손가락 걸고 꿈꿔본 적도 없으면서, 아이를 낳는다면 어떤 엄마가 되겠다는 상상도 크게 해본 적 없으면서, 그 때의 나는 임신이란 여자에게 디폴트인 것으로만 알고 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임신 및 출산에 대해서, 출산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다들 하는 것, 그러니까 언젠가 나도 하겠지. 당시 '리바이스 엔진스커트'가 유행하는 걸 보고 '어, 나도 사 입어야지' 했던 것. 놀랍게도 당시 임신과 출산이란, 나에게 그 정도 무게에 지나지 않았다.   


못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첫 번째 수술과 두 번째 수술 사이, 의학은 놀랍도록 발전했다. 더불어 나의 의식도 발전했다.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 역시 놀랍도록 발전했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15년 전보다는 ‘딩크족’이 매우 평범한 단어가 되었고, 출산이 개인의 선택이라는 사실도 상식이 되었다. 칠거지악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양성평등의 시대, 오늘의 나는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되는 날들 속에 살고 있다. 

 

이쯤 되니 이런 질문이 남는다. 


나는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인가, 낳지 못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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