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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꽃차이 Mar 01. 2024

강남 교보문고 책장 물어줄 뻔한 덕분에

너무 열심히 하지 않기

강남 교보문고 책장이 얼마일지 생각해본 적 있는지? 나 역시 그런 계산을 할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내가 물어준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얼마전 방영된 드라마, 킹더랜드에서 호텔리어인 주인공은 아이 고객이 잃어버린 곰인형을 찾아주겠다고 세탁실에 쌓여있는 이불 사이사이를 모두 들쳐본다. 땀까지 송글송글 맺혀가며. 이 모습은 본 20여년 경력의 선배가 묻는다. 

“왜 그렇게까지 해요?” 그리고 덧붙이는 말. 

“대부분의 문제는 너무 열심히 하는데서 생기거든요”


경험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이 말에 깊이 공감했다. 너무 열심히 한다는 것은 하지 않아도 될 것까지 한다는 뜻이다. 누군가 해보지 않은 일, 검증되지 않은 영역, 자신에게 바라는 성과나 영역을 자칫 넘어서서 좋지 않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위험까지도 포함한다. 드라마 주인공 역시 내 의무가 아닌 일을 하느라 자리를 비웠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었다.


이런 아찔한 열심은 장기적 판단이 아닌 단기적 열정에서 나온다. 나 역시 그랬다. 무언가 결정할 때는 반드시 담당자에게 확인해야 한다. 더 잘하기 위한 것, 수강생을 위한 것이라도 담당자가 곤란해질 수 있다면 멈춰야 한다. 담당자의 상사, 수강생 간의 형평성, 다른 수업과의 형평성을 다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나중을 생각한 열심’을 내야 한다는 것을 배운 일은 몇번 있었다. 그 중에 최고봉은 교보문고였다.


꽃 감수를 맡은 수브레인 컬러링북과 강남교보문고는 사이가 좋았다. 예술분야 팀장님이 많은 컬러링북 사이에서 수브레인 컬러링북만의 쉽고 내추럴한 장점을 알아보고 팀원을 통해 연락을 주셨다. 덕분에 여러 협업도 진행했다. 플라워클래스가 잘 되어 감사했다며 홍보코너 중에서도 중앙에 위치한 로얄석을 한달간 내어주셨을 때 수브레인 대표님과 나는 강남 한복판에 월세 없이 입점한 듯 기뻤다. 그도그럴것이, 비용을 내고 이용하려면 무려 100만원이라 했다.


마음껏 데코하라는 담당자의 말에 여러 아이디어를 내다가 꽃비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컬러링북 속의 꽃들을 크기 다르게 인쇄해서 코팅하고 한송이 한송이 오렸다. 그날따라 점심 먹은 돈까스집까지 유난히 엣지있어보이고 햇살은 더 반짝이고 세상이 우리편 같았다. 


설레이며 데코를 하러 갔더니 얼마전에 에세이를 낸 우리시대의 히어로, 이적 옆자리였다. 어머 반가워라. 이적 아저씨의 의견은 묻지 않고 “이적도 우리편이네” 하고 친한 척 끌어왔다. 책장 위쪽에 투명 아크릴판을 단단히 붙였다. SNS에 남자 둘이 올라가서 뛰어도 안 떨어지는 그 놀라운 초강력 접착테이프, ‘붙여보게’로 말이다.


투명실로 꽃을 살랑살랑 붙이니 예쁘고 뿌듯했다. “이거 어떻게 떼죠?” 하기 전까지는. 아이들이 매달릴 수 있으니 떼었으면 하는 연락을 받고 대표님이 다시 가보니, 남자어른 둘이 매달려도 꿈쩍도 안한다고 했다. 그 광고는 진짜였다. 붙여보라고 한다고 덥석 붙여보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건 이름에 100% 충실한 제품이었다. 붙여보게 하는 기능은 있지만 떼어내게 하는 기능은 없었다.

내 머릿속에 붙일 생각만 있고 뜯을 생각은 없었으니 누굴 탓하랴. 업체에 문의해보니 물이 닿으면 떼어질 수도 있다고 했다. 물이 책장에만 스며들면? 떼어질 수도 있다는 것은 안 떼어질 수도 있다는 말 아닌가. 


그 책장 얼마일까, 그보다도 잘 쌓아둔 관계가 무너져서 대표님께 피해를 끼치게 되면 어떡하지?방방이 탄 아이처럼 이리저리 뛰던 심장이 수브레인 대표님의 침착함에 차츰 동화되었다. 여러 리스크를 함께 잘 감당해왔던 관계라서 신뢰가 있었다. 제3자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니 이리저리 연락을 해보자고 했다. 그렇게 모은 의견들은 이랬다.

'어떻게든 떼어낼 수 있을 것이다. 간판업체나 인테리어업체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보이는 윗 칸이어서 떼어내도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담당자도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공감하고 함께 해결하자고 소통하면 된다. 대안을 만들어서 제시해보자'


다음날, 오픈시간이 되자마자 강남에 있는 간판 업체들에 전화했다. 강남교보문고인지라 책장이 훼손되면 곤란하다며 다들 안하려 했다. 비용 대비 리스크가 컸기 때문에 이해는 됐지만 해결은 안됐다. 일단은 가보자, 라며 뚜렷한 대책없이 일단 집을 나섰다. 배도 안 고팠다. 삼다수 여덟 병을 어깨에 짊어지고 가는 듯 했다. 지하철 첫 칸에 탔더니 터널이 그날따라 깜깜했다.


현장에 도착한 나는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아크릴판이 사라져 있었다. 누가 어떻게 떼었는지는 담당자도 몰랐지만 어떻든 떼어지게는 되어있었나보다. 이렇게 한뼘 성장하고 귀한 에피소드를 저금했다며, 함께 잘 대처했다며, 우리는 드디어 웃을 수 있었다.


갑자기 기분좋게 배가 고프고 다리가 삼다수 빈병처럼 가벼웠다. 세상은 짠하고 먹구름 휘장을 걷은 듯 아름답게 펼쳐졌다. 한달 옆집, 이적 아저씨의 '걱정말아요 그대' 노랫가사가 귓가에 달달하게 맴돌았다. 


그대여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 합시다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그대 가슴에 깊이 묻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떠난 이에게 노래 하세요 후회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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