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보려고 일부러 멀리 돌아다녔어
치자나무가 없어서 아쉽던 서울의 첫봄, 학교 캠퍼스에는 오래된 느낌의 돌 건물이 많았다. 큰길보다 건물 사이 좁다란 길이 좋았다. 도서관과 법대 건물 사이, 두 명이 겨우 지나갈 만한 그 길에서 제비꽃을 발견했다. 나지막한 키에 귀여운 모습이 처음 보았는데도 방긋 웃으며 손 흔들어 주는 다섯 살 아이 같았다. 걸음을 멈추고 ‘안녕.’ 인사할 수밖에 없었다.
대개 귀여운 꽃은 노랑이나 분홍색이다. 저렇게 우아한 보라색을 하고 귀여울 수 있다니. 작다고 꼭 귀여운 건 아니니까, 오밀조밀한 모양과 숙인 듯 안 숙인 듯 갸우뚱한 고개가 그 비법 같다. 그저 몇 송이, 몇 걸음 길이의 길이었지만 나만의 소중하고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빨간 머리 앤이 다이애나와 학교 갈 때 지나가던 제비꽃골짜기라고 이름 붙였다.
귀여움은 아름다움보다 친근한 매력이다. 마음을 열게 하고 다가가고 싶게 한다. 우아해지고 싶거나 경계하려는 마음을 내려놓을 때 가능한, ‘나를 낮춤’이기도 하다. 아기는 볼수록 귀엽듯이, 귀여운 매력은 질리는 법 없이 빠져들고 웃게 만든다. 판다는 다른 능력이 없어서 귀여움이 무기라는데, 푸바오의 인기를 보면 그 무기가 최고구나 싶다.
내 또래 엄마들은 귀엽다는 말을 들을 일이 잘 없다. 그래서 더욱, 순간순간 툭 튀어나오는 귀여운 느낌을 놓치지 않고 말해 주고 싶다. 꽃을 받을 일이 잘 없기에 꽃을 주고 싶듯, 말꽃을 건네본다. “예쁘세요.” 하면 “아유, 아니에요.” 하는 사람도 “귀여우세요.”, “방금 참 귀여우셨어요.” 하면 스스럼없이 웃어 준다. 그 미소가 꽃 선물을 받았을 때와 꽤 닮았다.
대부분 꽃은 눈에 띄는 한 가지 치트키를 갖고 있다. 색이 눈에 띄거나 키가 크거나 얼굴이 크거나 얼굴이 작아도 무리 지어 있거나. 제비꽃은 땅딸막한 높이에 조그만 보랏빛 얼굴을 하고 있어 그마저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제비꽃의 매력을 아는 사람은 봄마다 제비꽃을 발견하느라 금광처럼 즐겁다. ‘나를 생각해 주세요.’라는 제비꽃 꽃말 때문에 이타적으로 돌아보는 게 아니다. 한번 이 즐거움에 빠지면 동네 골목길마다 꿀단지 묻어 놓은 사람처럼 설레며 걷는다. 세밀화가 같은 눈을 가진 안도현 시인은 「제비꽃에 대하여」에서 이 비밀을 털어놓았다.
봄은 제비꽃을 아는 사람 앞으로는 그냥 가는 법이 없단다. 그 사람 앞에는 제비꽃 한 포기를 해마다 잊지 않고 피워 두고 가거든.
스무 살. 하루하루가 즐겁고 신나던 나이였다. 나이를 먹는 것조차 기대되던 시절. 하지만 3월에도 폭설이 내릴 수 있다. 세상의 봄에는 일기예보가 있지만, 인생의 봄에는 일기예보가 없었다.
지금도 자주 지나다니는 길에는 특별한 친구를 둔다. 캄캄한 골목길의 가로등처럼, 그 습관이 인생의 여러 어둠 속에서 나를 지켜 줄 줄은 더욱 몰랐다. 꽃으로 바위를 막을 수는 없지만, 절망은 비껴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