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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꽃차이 Apr 28. 2024

사람이 위로가 안 될 때, 라일락

매일 집 앞에서 기다려 주던 벗

스물한 살 11월, 빚더미라는 쓰나미에 인생이 쓸려 갔다. 그 피폐한 자리에 예상할 수 없던 일들이 몇 년간 폭격처럼 쏟아졌다. 사람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었고, 사람이 위로가 되지도 않았다. 후배들이 밥 사 달라고 할까 봐 여학생회관에 숨어 지냈다. 내가 왜 졸업 여행을 못 가는지 동기들은 몰랐다. 친구가 학교 앞으로 놀러 오면 선배에게 5천 원을 빌렸다.


돈 없이도 매일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있었다. 집 앞 라일락 나무였다. 존재감 없이 그늘 구석에 있었지만, 주위가 어두울수록 향기는 진하게 퍼졌다.


향이 강한 꽃은 대개 노크 없이 폐에 훅 들어오는데, 라일락 향기는 문을 열어 주길 기다리듯 조심스레 곁에 머문다. 비가 와도 연해지지 않고 더 촉촉해진다. 비 냄새와 가장 잘 어우러지는 향이기도 하다.


‘햇빛 없을 라’라는 한자처럼 즐거움이 없던 시절이어서였을까. 부드러운 발음만 남기고 싶었을까. 나는 ‘락’이라는 글자를 빼고 ‘라일이’라고 불렀다. 라일이는 향기 손길을 살며시 내밀어 내 등을 토닥토닥 감싸 줬다. 기다렸다며, 오늘도 잘 버텼다며.


향기를 들이마신다는 핑계로 한 번, 두 번 천천히 심호흡하며 어깨를 폈다. 남들처럼 키 큰 벚나무 아래서 활짝 웃는 사진은 없어도, 내겐 희미한 미소를 안겨 주는 내 키만 한 친구로 족했다.


마지막 꽃을 책 사이에 끼우고 이듬해 봄을 기다렸다. 조그만 꽃 하나하나가 모여 한 송이를 이루는 꽃 모양도 한 밤, 두 밤 쌓이면 봄이 온다고 말하는 듯했다. 상황은 봄이 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된바람 부는 날도 봄을 품을 수 있었다.


애초에 사람의 눈에는 봄이 보이지 않는다. 봄을 보는 것은 꽃이고, 우리는 꽃을 통해 봄을 본다. 그러니 봄을 기다린다는 건 어쩌면 꽃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꽃을 지닌다는 것은 봄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다.


꽃은 졌어도 향기는 코끝을 맴돌았다. 내게 기다림과 소망이란, 머리에 애써 밀어 넣는 문자가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약속이었다.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꽃이 다시 필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게 10년 같은 1년을 살아 내고 또 살아 내다 보니 이제 그 시절은 쌉싸름한 기억으로 남았다. ‘젊은 날의 추억’이라는 라일락 꽃말처럼.


치열함이 미덕인 세상이다. 하루라도 쉬어 가면 큰일 날 것처럼 부지런히들 달린다. 조금 천천히 가도 괜찮을까 싶은 날, 나무 친구는 말해 준다. 비바람 부는 날은 그저 버티는 것도 자라는 거라고. 향기는 비에 씻겨 내리지 않는다고.


나무를 친구로 두니 한 사람도 한 그루의 나무로 다가왔다. 세상에 다른 나무보다 나은 나무란 없듯, 나 역시 누구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었다. 나무를 올려다보듯 사람도 낮은 곳에서 바라보니 새로웠다. 꽃이 화려하지 않아도 오래도록 피어 있기도 하고, 잎이 꽃보다 깊이 있게 물들기도 하고, 줄기가 수묵화처럼 고즈넉한 선을 그리기도 했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비바람에 생긴 생채기 하나둘쯤 품고들 있었다. 쉽게 생긴 나이테란 없었다.


영 자라지 않는 것 같은 누군가가 있다면, 버티는 것만으로 대견한 겨울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의 나처럼 말이다. “힘 내.”보다는 “나는 네가 그냥 참 좋아.”라고, 나무 같은 소리나 넌지시 두고 오고 싶다. 하지 않으려는 표현이 또 있다. ‘나라면’이라는 말이다. 자칫 내가 너보다 낫다는 이야기가 될까 봐 조심스럽다. 그저 너도 나무, 나도 나무려니 한다.

특별한 친구를 인생길에 들인지 20여 년이 지났다. 집 앞마다 친구들을 만들었다. 매번 친구는 달라지지만, 새로운 동네에 이사 가면 가장 먼저 찾는 꽃은 라일락이다. 봄이 아니어도 알 수 있다. 하늘거리는 하트 모양 잎에 줄기가 가느다랗다면 라일락이니까. 대개 지나다녀도 눈에 안 띌 만한 곳에 보물찾기처럼 숨어 있다.


집 근처에서도 가장 나지막한 라일락 나무에게 정이 들었다. 이제는 일락이라고 이름 지었다. 매일의 기쁨. 라일이에게 하고픈 말을 일락이에게 했다. 두서없이 말해도 알 것 같았다.     


고마워. 매일 기다려 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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