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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꽃차이 Apr 29. 2024

삶이 메마를 때, 수국

1.5초 고속 수분 충전

둘째는 소화 기능이 약한 아이였다. 모유를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분유를 먹이면 1시간을 안고 등을 쓸어내려도 어김없이 토하곤 했다. 아무리 소화 잘된다는 분유도 소용없었다. 그러니 이유식을 잘 먹을 리가 없었다.

9개월 즈음, 형에게 독감이 옮았는데 열이 내리지 않았다. 불덩이 같은 아이를 기저귀만 입힌 채로 안고 대학병원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온갖 검사를 하고서야 알게 된 병은 이름부터 낯설었다. 가와사키. 면역력이 약해져서 생기는 병이라고 했다.


이 병이 있는 아이 엄마들은 아이를 안 먹이더라고요.

담당 교수가 아이 잘 먹이는 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듯 말했다. 나는 아이 안 먹여서 아프게 한 철딱서니 없는 엄마라는 낙인이 찍혔다. ‘아이가 면역력이 약하니 사람 많은 곳에 가지 말 것’이라는 처방을 받았다.


낮 내내 안겨 있던 아이는 밤마다 여섯 번을 채워서 깼고, 낮잠은 알람처럼 15분 후면 일어났다. 아침이 오면 나는 잠을 잔 건지 안 잔 건지 알 수 없게 머리가 멍했다. 어딜 가고 싶다거나 누군가 만나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도 전혀 들지 않았다. 교수님의 처방전이 아니더라도, 내 외로움은 만난다고 해소될 카테고리에 속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커질 수도 있었다. 아니, 사람과 거리를 두고 싶었다. 겪어 보지 않은 다른 엄마에게 공감을 기대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따갑게 배웠다. 군대를 나왔다고 다 같은 추억이 있는 게 아니듯 탓할 일은 아니었다.


아들만 둘이에요?


마트 앞 건널목이나 소아과 건물 엘리베이터 앞에만 서 있어도 꼭 누군가 다가와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하나 더 낳으라느니, 딸 없으면 나중에 어쩌려고 그러냐느니 하는 말은 그래도 양반이었다.


공부도 안 하고 낳았나 봐요?
어머, 너 몇 살이니? 왜 이리 작니? 너희 엄마는 너를 안 먹이니?


별말을 다 듣다 보니 누군가 다가오는 파장만 느껴져도 멀리 피했다가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곤 했다. 내가 너무 순둥하고 만만한 인상인 걸까? 가죽 재킷 깃 세워 입고 빨간 립스틱 바르고 징 잔뜩 박힌 가방이라도 들고 있어 볼까? 순도 100%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친한 동네 엄마 한 명 없던 시절, 조경이랄 것도 없던 두 동짜리 아파트 화단에 의외로 수국이 있었다. 딱 내가 드나드는 입구 앞에만. 그리 크지도 색이 진하지도 않아서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을 듯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존재감 없는 아이에게 끌리는 나는 희미한 꽃잎에 시선이 머무르는 1.5초 동안 행복한 추억을 고속 충전했다.


수국을 보면 몸은 이곳에 있어도 마음은 제주도 서귀포시 동홍동으로 날아갔다. 생의 가장 충만한 계절을 여러 번 보낸 곳. 그 동네 골목 여기저기 피어난 소박한 수국들이 떠올랐다. 눈길을 사로잡거나 무더기로 피어 있지도 않아도 반짝이던 시간과 수국은 세트로 묶여 있었다. 그렇게, 메마른 마음에 수국이 한 삽 한 삽 수로를 만들었다.

水(물 수)가 이름에 들어갈 만큼 수국은 물을 좋아한다. 꽃잎처럼 보이는 부분은 사실 꽃받침이다. 이곳으로도 물을 흡수하니 분무기로 자주 물을 뿌려 주면 보름 정도는 충분히 볼 수 있다. 아주 시들시들하다면 물속에 거꾸로 30분 정도 잠수시키면 싱싱해진다. 사람에게도 진한 채움의 시간이 필요하듯이.


주의할 점 첫 번째, 다른 꽃은 꽃잎에 물을 뿌리면 상한다. 수국만이 가진 사랑의 언어다. 두 번째, 물을 뿌리는 돌봄에 은근히 중독될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더 싱그러워 보이는 모습이 좋다가 반려 식물로 가꾸는 듯 정이 든다. 세상에 정드는 것만큼 무서운 것도 드물다. 세 번째, 깜빡하고 너무 오래 두면 수국 머리가 무거워져서 목이 꺾일 수도 있으니 욕조에 둔 아이처럼 잊지 않아야 한다.


“나 물 좋아해요! 물 많이 줘요!”라고 외치는 자기표현의 꽃, 수국. 내 곁에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아이를 수국 닮은 아이라고 여기니 사랑스러웠다. 수국 한 송이 키운다 생각하고 칙칙 물 뿌리듯 자주 사랑을 표현했다. 이제는 아이가 나를 매일 꼭 안아 준다. 내 마음이 물방울 맺힌 꽃잎처럼 촉촉해진다.


“하나의 꽃잎, 또는 한 마리의 벌레가 도서실의 모든 책보다 많은 것을 간직하고 있다.” - 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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