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 가방보다 샤넬 플라워
아이 엄마, 일 다녀요?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할머니가 물었다. 회색 단발이 단정하게 어울리고 눈매가 또렷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나는 추리닝이나 홈웨어 바람으로는 쓰레기 버리러도 나가지 않았다. 옷만은 깔끔하게 내 마음에 들게 입었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한숨이 나오지는 않게. 누가 보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마저 나를 아무렇게나 입힐 수 없다는 내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숫기 없는 딸일수록 어깨 펴고 다니라고 예쁘게 입혀 보내는 엄마 마음 같달까.
그날, 딱 무릎까지 오고 펀칭 디테일이 있는 까만 플레어스커트와 하얀 7부 레이스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스커트는 친한 동생이 준 것이었고 블라우스도 케이크 가격 정도였지만 신경 써서 입은 느낌은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공격적인 태도는 아닌 것 같다고 느껴졌다. 그래도 일단 방어적으로 조그맣게 “아니요….” 했다.
그런데 아이 둘 데리고 이렇게 예쁘게 입고 다녀요?
자기 관리가 정말 잘되는 분이네요!
전혀 뜻밖의 말이었다. 마치 깜짝 고백을 받은 듯했다. “고맙습니다.”라고 대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그 말이 마음에 쿵 박혔다. 그동안 마음에 고이고 눌어붙은 배려 없는 말들이 싹 씻겨 내려갔다. 그래, 어떤 말을 마음에 남길지는 내가 정하는 거야. 나도 나중에 그분 즈음의 나이가 되면 화이트 베이지 블랙으로 깔끔히 입어야지. 그리고 아기 엄마를 만나면 꼭 칭찬을 해 줘야지.
이런 다짐은 잊기 쉬운 게 사람이다. 진심 어린 칭찬에 감동하다가도 자존감 무너뜨리는 한마디가 마음을 훅 쓰러뜨린다. 반나절 만든 모래성을 파도가 한 번에 점령해 버렸을 때처럼 허무해진다. 그래서 적어 두고 붙여 두고 눈과 마음에 담으려 애를 쓴다. 또 하나의 무기를 만들었다. 꽃에 그 기억을 연결해 두기.
나 혼자 ‘샤넬 플라워’라고 부르는 꽃이 있다. 화이트와 블랙의 조화, 매끈하고 깔끔한 줄기, 오니소갈룸. 한 줄기씩 파는 이 우아한 꽃을 나는 별일 없어도 사 오곤 한다. 한 줄기만 꽂아도 고급스럽고 오래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 소중한 기억과 다짐을 떠올리기 위해서다.
말 선물을 건네는 단아한 할머니로 늙어 가고 싶다. 샤넬 가방보다 자존감을 높이도록, 샤넬 가방보다 오래 남도록, 마음 가방에 자존감 조각 하나 쏙 넣어 주는 할머니. 특별히, 지쳐 보이는 아들 둘 엄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