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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꽃차이 May 01. 2024

기회는 건너간 것 같을 때, 옐로우 라일락

나의 취직은 불가능했다

첫째를 임신하고 있을 때, 리본 공예와 포장 공예 강사 자격증을 땄다. 당시는 대부분의 백화점과 문화센터에 리본과 선물 포장 클래스가 있었다. 여유가 있어서 배운 게 아니었다. 백수 생활 동안 모아 둔 돈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 뭐 하고 살지 고민이 깊어지던 때였다.


나는 뭘 좋아하지? 뭘 잘하지? 뒤늦게 시작된 질문은 여고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내 사물함에는 남들에게 없는 게 많았다. 포장지, 하드보드지, 양면테이프, 각종 종이, 48색 색연필… 친구들은 그곳을 만물상이라고 불렀다. 조물조물 참 많이도 만들었다. 옆 반의 모르는 아이까지 포장을 부탁하기도 했다.

    

더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며 하고 싶은 것을 미루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선물 포장 클래스에 등록했다. 손으로 무언가 만드는 건 생각보다 훨씬 즐거웠다. 수업 날은 한 주 중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 되었다. 처음부터 강사 자격증을 생각하진 않았지만, 신이 나서 하다 보니 마지막 단계까지 와 있었다.


아이를 키우고 나면 강사를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막상 둘째를 어린이집 보낼 때가 되어 눈을 돌리니, 세상이 변해 있었다. 리본과 선물 포장 클래스는 사라졌고, 일자리는 백화점이나 대형 서점 포장 코너뿐이었다. 아이들을 두고 최저 시급으로 9시부터 18시까지 근무할 수는 없었다. 그동안 배운 게 다 쓸모없어진 건가, 나는 이제 무얼 하지? 한 계단은 올라왔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바닥이었다.     


배워 두면 다 도움이 된다, 물론 맞는 말이다. 플로리스트가 된 지금, 꽃 포장도 다 종이와 리본을 다루는 일이기에, 많이 다뤄 본 손이 어려워하지 않는다. 몸이 배운 것은 다 기억한다는 말은 운동뿐 아니라 공예에도 적용이 된다.


눈도 기억한다. 유광 알레르기랄까, 반짝거리는 포장지와 리본을 보면 등줄기에 두드러기 돋는 느낌이다. 고급 재료가 왜 고급인지, 어떤 재료가 사진이 잘 나오는지 눈이 안다. 꽃 자재 파는 곳 외에도 재료를 구할 수 있고, 리본도 다양하게 묶는다.     


그래도 말이다, ‘지나고 보니 도움이 되더라.’보다 ‘안 되면 어떠랴.’라는 시작을 권하고 싶다. 선택하고 배웠던 것들이 다 도움이 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시절의 나에게 의미 있고 생기 있는 시간을 주었다면 이미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나 역시 많은 공예를 배웠고, ‘나 이런 것과 안 맞는구나.’라는 깨우침만 남기도 했다. 덕분에 꽃이 왜 잘 맞는지 알게 된 것도 도움이다. 뭐든 생각하기 나름이다.


꽃이라는 말이 단어 속에 쓰이면, 예쁘다(꽃단장), 계절(꽃샘추위), 여인뿐 아니라 처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래서 꽃등은 ‘맨 처음’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또 다른 의미도 있다. 감동적인 일의 절정, 소중한 것. 이제 막 피어나려고 꽃잎이 비치는 꽃망울이 어쩌면 가장 아름답듯, 시작이 감동적인 절정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라일락은 놓치기 쉬운 봄꽃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노란 산수유에서 시작해서 벚꽃, 철쭉으로 옮겨 가는 동안 건너뛰게 된다. 발치에 보이는 민들레나 제비꽃과 달리 어느 구석에 조그맣게 피곤 한다. 무리 짓지도 눈에 띄지도 않는다.


어느 해 봄, 막 피려는 라일락을 기억해 두었다. 그런데 플로리스트에게는 극성수기인 어버이날을 바삐 보내고 가 보니 이미 져 버린 게 아닌가. 어찌나 아쉬웠던지 ‘미안해. 보고 싶었는데….’ 하며 곁을 서성거렸다.   

  

옐로우 라일락이라는 꽃이 있다. 라일락을 놓쳐서 아쉬운 마음을 달래 주듯 라일락 진 후 꽃 시장에 나온다. 썸머 라일락, 부들레아라고도 부른다. 채도 낮고 깊이 있는 노랑빛이 골드 두 스푼, 로즈골드 한 스푼 넣은 듯 우아하다. 흔하지 않으면서 어디에나 어우러지고 따스함과 우아함까지 더해 주니 플로리스트에게 화룡점정처럼 반가운 컬러다. 위를 향하는 대부분의 꽃과 달리 늘어지는 모양이라 유니크하고 안정감을 더해 준다.

이렇게 튀지 않는 고급 포인트가 되는 꽃은 부피에 비해 가격이 비싸지만 있고 없고는 무척 다르다. 꽃을 배울 때 선생님이 시장에 있으면 무조건 사 온다고 하셨는데, 나 역시 어디에나 넣고 싶다. 화려한 꽃이 많은 꽃 시장에서 모르는 사람은 지나치기 쉽지만, 아는 사람에게는 기회처럼 잡고 싶은 꽃이다.     


컬러와 모양, 이름까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듯하다. 봄의 라일락만이 라일락은 아니라고, 인생의 여름에도 라일락은 핀다고. 어쩌면 더 나다운 기회로 다가와 내 눈에만 보일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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