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생활에 익숙해진 후에야 깨달은 게 있다면,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과 이 곳 친구들의 유년기가 사뭇 다르다는 것이었다.
스물셋의 머릿속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유년시절의 행복을 떠올려보자면 - 여름이면 집 바로 뒷 산 계곡에 가서 푹 젖어 돌아왔던 기억이나, 마당에서 강아지 공 던져주다가 장독대 깨 먹은 기억, 동네 한가운데 수백 년된 은행나무 아래서 동네 친구들과 달리기 시합, 동생과 숨바꼭질을 하면 꼭 숨어있던 조그만 다락방, 여름밤 옥상 평상에 누워 모기향 피워놓고 먹던 수박...
오늘 밤 불현듯 떠오른 기억은 찌는 더위가 한 바탕 물러나고, 매미 대신 귀뚜라미가 울면 언제나 들려오던 찹쌀떡, 메밀묵 파는 아저씨 목소리다.(호박엿 아저씨도 자주 오셨다.) 할머니나 엄마 무릎을 베고 잠이 살폿 들었다가도 "찹쌀떡- 메밀묵-"소리만 들리면 강아지와 동시에 벌떡 일어나곤 했다. 그땐 그 음성이 왜 그리도 반갑고, 찹쌀떡은 또 왜 그렇게 먹고 싶었는지... 눈을 부비면서도 할머니나 엄마를 졸라 잠옷 바람으로 찹쌀떡을 사러 나가곤 했다. 정확하지 않은 내 기억을 끄집어내 보면 그 당시 찹쌀떡을 살 때 2천 원을 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이후 찹쌀떡을 내 돈 주고 사 먹은 기억이 거의 없지만, 지금은 아마 그 두 배 이상이지 않을까 싶다. 그 시절엔 2천 원만 있으면 여름방학이 떠나가는 서운함도 달콤한 팥앙금 한 입에 싹 달아나곤 했다.(사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일주일 용돈이 2천 원이 안 되었으니, 찹쌀떡은 엄마나 할머니를 졸라야만 먹을 수 있는 호화 야식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찹쌀떡 아저씨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고, 학창 시절에는 코피를 쏟아가며 책상머리 앞에 앉아있었으니 그 음성에 대한 그리움을 잊은 채 지냈다.
시간은 흘러 스물셋이 되었고, 난 이제 가족 없는 타지 생활이 꽤나 익숙해졌으며, 사회생활의 쓴맛을 제대로 겪고 있는 인턴 나부랭이로 살고 있다. 그런데 이 정신없는 큰 도시의 변두리에서 창문 너머 익숙한 음성을 들었다. "찹쌀떡~... 메밀묵~..." 단조롭게 울려 퍼지는 저 여섯 음절 때문에 피식 반가운 웃음이 나왔다. 오래전 잠옷바람으로 2천 원을 꼭 쥐고 뛰어나오던 어린 나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엄마 혹은 할머니 무릎을 베고 산들바람맞으며 단잠에 빠졌던, 내 어린 시절의 행복에 다시 잠긴다.
내일 밤에는 2천 원을 쥐고서 낯설고도 반가운 이의 음성을 기다려보련다.(물가 상승을 고려해 맘 편히 만 원을 쥐고 있자.) "찹쌀떡- 메밀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