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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기웅 Oct 12. 2019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읽다

완벽한 문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웃으면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세 차례 내뿜는 동안 잠자코 카운터의 나뭇결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5년 전에 뇌종양으로 돌아가셨어. 아주 지독했어. 꼬박 2년 동안 고생하셨지. 우리는 그 때문에 돈을 몽땅 써버렸어.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어버린 거야. 더군다나 식구들은 모두 지쳐서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흔히 있는 얘기지. 안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신경질적으로 웃으며 진저에일 잔을 옆으로 밀어놓았다.
“가족을 헐뜯는 건 분명 좋은 일은 아닌가 봐. 기분이 우울하네”
“신경 쓸 것 없어. 누구나 뭐가 됐든 문젯거리를 끌어안고 사는 법이니까”
“너도 그래?”
“그럼. 언제나 셰이빙 크림 통을 움켜잡고 엉엉 운다구”
그녀는 즐거운 듯이 웃었다. 몇 년 만에 웃어보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주인공은 방학을 맞아 고향에 머무른다. 그가 태어나고, 자라고, 처음으로 여자와 관계를 가졌던, 거대한 항구가 있는 작은 곳이다. 고향에 돌아온 ‘나’는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친구 ‘쥐’와 맥주를 마시며 제이스 바에서 시간을 죽인다. 어느 날 ‘나’는 바 화장실에서 만신창이로 취해있는 여자와 만난다. 그녀의 왼손엔 새끼손가락 하나가 없다. 나는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하룻밤을 같이 지내게 된다. 이를 인연으로 둘은 가까워지지만 모종의 이유로 ‘그녀’는 ‘나’를 떠난다. ‘그녀’는 일주일 후에 나타나 사실은 낙태 수술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나는 대학으로 돌아간다. ‘나’가 겨울에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왼쪽 새끼손가락이 없는 ‘그녀’는 하던 일도 그만둔 채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다.

                         

“혼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여러 사람이 나에게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려.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 아버지, 엄마, 학교 선생님, 여러 사람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개 듣기 싫은 소리뿐이야. 너 같은 건 죽어버리라거나 또는 경멸하는 말들…….”
“어떤 얘긴데?”
“말하고 싶지 않아”
(...)
“이런 얘기를 한 건 네가 처음이야”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손은 계속 가늘게 떨렸고,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에는 식은땀이 흥건히 베어 있었다. “거짓말 따윈 정말 하고 싶지 않았어”
“알아.”
우리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제방에 부딪치는 작은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줄곧 침묵하고 있었다 그것은 생각해 낼 수도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는 울고 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 젖은 뺨을 쓰다듬고 나서 어깨를 끌어안았다.

                            

우리는 태어났기 때문에 슬프고 외롭고 괴롭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지쳐 죽어가는 사람들이 서로 살을 맞댈 때, 삶은 다시 살아난다. 극복되고 재생된다. 사랑은 슬픔과 고통을 완전히 없애주지 못한다. 다만 사랑은 함께 외로워하고 서로를 위해 슬퍼해줄 수 있다. 우리는 매일 무언가를 잃으며 죽어간다. 하지만 ‘무언가를 잃으며 죽어간다’는 상실감을 공유하는 덕분에 기꺼이 살아갈 수 있다. 허무함과 상실감이 오롯이 나의 고통이면서도 온전히 나 혼자만의 괴로움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안도감. 그 상처의 보편성을, 묵묵히 라디오를 듣고 맥주를 마시며 시답잖은 연애로 소화시키고 담아내는 것. 그것이 바람의 노래를 듣는 방법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 '단순하지 않은 현실'을 '단순한 문체'로 표현할 줄 안다. 살아오면서 또래 여자를 좋아해 본 적은 몇 번 있지만, 70세 노인을 좋아하게 된 건 무라카미 하루키가 처음이다.

                                   

“12년, 13년 전쯤, ……아버지가 병에 걸린 해야. 그전의 일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계속 좋지 않은 일만 일어났어. 머리 위에선 언제나 나쁜 바람이 불고 있어.”“바람의 방향도 때가 되면 바뀔 거야.”“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언젠가는.”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사막 같은 건조한 침묵 속으로 내 말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삼켜졌고 씁쓸함만이 입안에 남았다.
“몇 번씩이나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어. 하지만 언제나 실패했지. 사람도 좋아해 보려고 했고, 인내심을 가지려고도 했지만…….”
우리는 그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끌어안았다.”
(...)
오랫동안, 정말로 오랫동안 그녀는 침묵했다. 나는 거의 꾸벅꾸벅 졸면서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그녀는 꿈꾸듯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나'는 겨울방학을 맞아 다시 고향을 찾지만, 왼쪽 손가락이 네 개밖에 없는 여자는 레코드 가게를 그만두고 살던 아파트도 떠났다. 사람의 홍수와 시간의 흐름 속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깨끗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나’는 그녀를 다시 볼 수 없었고 종국에는 다른 여자와 결혼해 행복하게 산다.


그것만으로 족하지 않을까. 한여름처럼 무더운 남의 삶에 잠깐이나마 서늘한 바람이 되어주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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