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지고 핀 연두색 싹이 초록 잎으로 짙게 물들며 햇살에 유독 반짝이던 4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집 앞 공원에 있던 그 잎들은 바람에 살랑살랑거리며 봄의 절정을 알렸다. 남자친구와 손깍지를 끼며 여유로이 이 봄을 만끽하던 중 나는 이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엄마, 아빠 쇼윈도 부부야.”
4년을 사귄 남자친구에게 우리 부모님을 소개하는 말이었다. 남자친구랑 헤어지고 싶어서 혹은 남자친구가 나에게서 멀어지길 바라며 꺼낸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 남자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었고 더 이상은 숨길 수 없었다.
아빠의 자기중심적인 성격은 알게 모르게 엄마를 많이 다치게 했고 엄마는 아빠의 그런 모습을 참기 힘들어했다. 그때마다 엄마, 아빠가 싸우는 소리가 내 방문을 넘어 들리곤 했는데 어린 맘에 나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울다가 지쳐 잠들곤 했다. 하지만 그런 나도 엄마, 아빠의 싸움이 10년 동안 지속되는 걸 보면서 무덤덤해져 갔다. 엄마가 아빠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그건 아빠와 싸웠다는 뜻이고 당분간 아빠와 말을 섞지 않겠다는 선전포고였다. 오빠와 나는 그 신호를 알아채면 엄마가 화가 풀릴 때까지 적당히 눈치를 보며 자기 할 일을 하며 그 기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랐다. 오빠와 나는 어쩌면 이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싸움은 우리가 엄마, 아빠에게 자식들이 화해하라고 귀엽게 응석을 부려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걸. 이미 엄마와 아빠 사이에는 큰 감정의 골이 생겨났고 거기에 우리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어느덧 우리 부모님의 사이가 다른 부모님들처럼 마냥 평범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 나이에는 “그들은 왜 이혼을 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아빠가 이혼을 하지 않는 이유는 너무도 선명히 보였다. 보수적이고 고지식했던 아빠는 본인 인생에서 ‘이혼’은 절대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엄마는 추측건대 금전적인 문제와 미성년자였던 나와 오빠를 두고 나가기엔 마음이 약했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 아빠는 1년에도 수십 번씩 반복되는 싸움에도 불구하고 ’이혼‘이란 단어는 절대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성인이 되자마자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있었던 큰아빠네 부부와 우리 엄마와의 갈등이 심화되면서부터이다. 친가 쪽 재산을 핑계로 10년 동안 명절에 얼굴도 보이지 않던 큰아빠네 부부가 편찮으신 할머니, 할아버지를 대신해 본인들이 앞으로 제사를 맡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여기에 큰아빠네 부부의 편을 들어주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에 엄마는 그동안 가져왔던 섭섭함이 배신감으로 변했을 것이다. 또한 그런 큰아빠네한테는 아무 말도 못 하면서 우리 가족에게만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는 아빠의 모습에 엄마는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고 얘기했다. 그런 엄마는 2019년 겨울, 아빠와 이혼을 결심했다.
그 소식을 들은 오빠의 반응은 ”우리가 다 독립하면 하지…“라고 말했지만 무조건적으로 반대하기엔 그동안 힘들게 버텨온 엄마의 시간들을 무시할 순 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 오빠와 같은 마음이었기에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침묵으로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엄마의 이혼 통보에 아빠는 예상된 반응은 ‘no’ 였다. 한 날은 술을 먹고 들어와 엄마에게 본인 인생에 아내는 당신뿐이라고 우리가 왜 이혼을 하느냐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들은 난 ”평소에 좀 잘하지”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채웠다. 평소에 엄마에게 상냥한 말 한마디, 조그마한 배려가 있었더라면 엄마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거란 걸 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빠와 나를 유독 예뻐하는 외삼촌은 엄마가 아빠와 결혼하고 사람이 많이 날카로워졌다고 말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고 공장에서 일을 한 엄마는 회사에서 간식으로 빵이나 과자가 나오면 아껴뒀다 집에 있는 어린 삼촌에게 갖다 줬다고 한다. 또 20대에는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은 외삼촌을 극진히 간호해줬다고 하면서 얼마나 착한 사람이었는지 아냐고 삼촌은 말했다. 그래서인지 삼촌은 조카들 중에 유독 오빠와 나를 예뻐했다. 어렸을 땐 몰랐지만 크면서 자신을 위해 희생한 누나의 자식들이 태어났을 때, 얼마나 사랑스럽게 쳐다봤을지. 문득 삼촌의 그 모습을 잠깐이라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빠는 본인이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식된 입장에서 아빠는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마냥 미울 수만은 없는 아빠였다. 22살부터 집배원으로 일하면서 땡볕에도 편지를 배달했고 혹한기에도 편지를 배달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아빠는 출근했고 본인이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덕분에 오빠와 나는 풍족하진 않았지만 남들이 먹는 만큼 먹을 수 있었고 남들이 입는 만큼 입을 수 있었다. 본인도 잘리지 않지만 남도 잘리지 않는 공무원의 특성상 싫어하는 사람을 매일 봐야 하는 아빠였지만 상사의 갑질에도 30년 넘게 성실히 일해왔다. 그 스트레스로 종종 아빠는 자면서 욕을 하는 잠버릇이 생겼다. 이런 아빠의 모습에 엄마는 “너희 아빠 싫은데 저럴 때 보면 또 안쓰러워.”라고 말하기도 했다. 가장의 역할도 제대로 하지 않는 아빠였다면 무조건적으로 싫어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해준 아빠에 대한 나의 감정은 아쉬움, 속상함, 미움 이 세 가지가 복합적으로 엉켜 있었다.
하지만 이혼을 결심했을 때의 엄마는 이제 아빠에 대한 안타까움도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그래서 엄마, 아빠가 이혼을 하게 되면 그 선택을 존중하고 오빠와 나는 엄마, 아빠 둘한테 다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빠의 거듭된 반대 의사에 엄마는 체념한 듯했다. “너희 아빠가 안 해준다는데 어떡하니.“라고 말하며 엄마와 강고했던 아빠는 일상으로 돌아간 듯했다. 하지만 예전과는 확실히 달라 보였다. 아빠에 대한 엄마의 애정은 제로로 보였고 형식적으로 아빠와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 듯했다. 아빠도 이에 대해 큰 불만이 없는 듯 했다. 이혼까지 안 가게 된 걸 다행이라 생각하며 엄마와 펑소처럼 생활하는 것 같았다.
현재까지도 엄마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뵙지 않는다. 하지만 부부 동반 모임엔 아빠와 꼬박꼬박 동행한다. 평소처럼 엄마는 아빠와 외식을 하고 출근 전 아빠에게 아침밥을 차려준다. 하지만 그 안에 묻어난 엄마의 무뚝뚝한 목소리 톤과 아빠가 무엇을 하든 관심 없다는 뉘앙스의 말투가 변화된 그들의 사이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런 엄마와 아빠 사이를 보며 나는 엄마한테 “엄마 아빠 쇼윈도 부부야?”라고 물었다. 그러자 엄마는 ”맞지, 쇼윈도 부부지. 남들이 보기에만 부부 사이지, 뭐.“라고 말했다.
이렇게 엄마가 이혼을 선언한 지 2019년에서 4년이 지난 2023년, 지금도 그들 사이는 변함이 없다. 이런 부모님의 관계를 보면서 자식으로서 난 그들의 사이가 더 좋아질 거라는 기대도 나빠질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는다. 다만 엄마와 아빠의 선택이 ‘쇼윈도 부부’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익숙해지고 나 역시 평소처럼 행동하는 것이 다이다. 가끔 그런 부모님을 지켜보고 있으면 맘이 좋진 않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한 부모님의 결정에 내가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다. 25년 동안 가족을 지키기 위해 본인을 희생한 엄마의 선택을 존중하고 싶었고 아빠도 가장으로서의 역할이 아닌 남편으로서의 지난 30년의 세월을 돌아보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