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대상에 대한 정서나 사상을 함축적인 언어로써, 운율을 살려 표현한 것이고, 수필은 작가의 경험과 깨달음을 자유롭게 풀어쓴 성찰의 글이다. 반면 소설은 서사성이 두드러지는 글, 인물들 간의 갈등과 사건과 복선이 두드러지는 글, 허구성이 두드러지는 글, 하지만 동시에 현실을 반영하는 글이기도 하다. 그리고 소설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5단 구조 혹은 기승전결로 나타나는 글'
초, 중, 고, 대학교의 교육을 마치고 평범하게 직장인이 된 나는 어느 순간 의문이 들었다. 우리가 학창 시절 배운 학문들 대부분이 효율적인 서열화를 위해 가공된 것 같다고. 그래서 기성 교육을 통해 배워온 것들만으로 평생 살아간다는 것은 스스로 좁은 틀 안에 자신을 가두어 두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내가 뭘 어떻게 하겠나. 당장 회사를 때려치우고 먼~ 훗날 대통령이 되거나, 혹은 교육부 장관이 되어 뭘 하는 것도 아니고.
회사 연차가 쌓여갈수록 좁아지는 시야와 늙어가는 생각들.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 인해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늘 비슷한 회사 동료들과 오래되어 익숙해진 친구들이 주는 편안함에 취해 넓은 바다로 헤엄쳐갈 생각을 하고 있지 않었다.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지, 이건 아니지.....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지난 3년 동안 이것저것 다양한 대외활동도 해보고, 영화도, 운동도, 여행도 꾸준히 다니면서 스스로의 틀을 깨고 더 넓게 많은 것을 경험하고자 노력했다. 독서는 나에게 다가온 두 번째 찬스였다. 작년 독서 초창기 까지만 해도 자기 계발서와 에세이 정도를 즐겨 읽었다. 그 후 사회문제를 다룬 책들을 읽게 되었고, 한동안은 인문학 책들에 푹 빠져있었다.
나름대로 다양하게 늘려가던 나의 독서 사전! 괜히 뿌듯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독서 습관에서 자랑스러운 점이 하나 있다. 늘 비슷비슷한 책만 읽고 비판 없이 그것을 수용하려 하지 않았던 점. 다만 요즘은 친한 지인의 말처럼 '너무 작가들을 띄우는 독서를 한다'라는 것을 늘 마음에 새기며 스스로 독서 방법을 바꾸려 하고 있다. 인스타로 작가님들을 알게 되니, 약간은 친화적인 리뷰를 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책들을 보면 분명 작가가 펼쳐놓은 특정한 입장이 존재한다. 처음에는 안 보이지만 몇 번 읽다 보면 그것이 글 속에 내재되어 있음이 파악된다. 독서를 할 때 그 책이 어떤 구조와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잘 생각해야 한다. 글이 뻔지르르하다고, 작가를 무턱대고 칭송하는 자세도 자중해야 하며(지극히 나의 경험담), 그렇지 않으면 늘 익숙해진 비슷한 책에만 손이 가고, 읽게 된다.
맹자는 말했다.
“책만 읽고 생각하지 않는다면(그 책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검증하지 않는다면) 읽지 않는 것만 못하다.”
그래서 독서를 할 때는 읽는 책의 논조와 반대되는 책도 연달아 읽어보고 둘을 비교해서 내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리고 리뷰로 정리해 본 뒤 실제 생활에서 행동으로 이어진다면 최고의 독서가 아닐까.
연초에 북 태기와 인태기가 동시에 왔을 때, 고전을 좋아하는 친한 지인이 고전을 읽어보라고도 권유해줬다. 사실 고전은 아직까지 크게 와 닿지 않아서 그동안 내팽개쳐왔던 소설을 한번 읽어볼까 하고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근데 유명 소설은 결국 모두 다 고전이었다.) 그동안 소설을 등한시 해왔던 이유는, 그저 허구에 불과하고 실제 생활에서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지극히 꼰대 같은 얄팍한 생각 때문이었다.
제대로 독서 체력이 생기지 않았음에도, 위화의 "인생_살아간다는 것"과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었다. 대문호들의 글은 내가 감당하기에 엄청나게 버거웠지만, 모르는 용어는 사전을 찾아가며 천천히 읽었다. 역시나 그들의 글은 정말로 남달랐다.
그리고 나는? 당연히 그 두 분의 필력에 빠져들어 팬이 되었다. 최근에 "그 후", "마음"으로 알게 된 나쓰메 소세키도 최애 작가님이 되어 TOP3로는 위화 / 김훈 / 소세키 가 자리 잡았다. 아..... 소설 이렇게 매력 있고, 이렇게 큰 울림이 있었구나. 세 분의 작품을 읽고 나는 가슴이 벅차올라서 한동안 계속 머릿속에서 그 작품들이 떠나가지 않았다. 소설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혹은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나는 빠지고 또 빠졌다.
아...... 읽고 싶고, 쓰고 싶다.
순서대로 김훈, 위화, 나쓰메 소세키
소설가들은 소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다음의 내용은 소설가의 입장에서 소설을 쓰는 이유이다.
"한때 소설 쓰는 일을 이삭 줍는 행위라 생각했습니다. 삶의 바닥에 떨어진, 한데 모으면 유용한 양식이 될 낟알들을 열심히 찾아다녔습니다. 또 한때는 잡다한 세상사를 가지고 마디를 만들고 매듭짓는 일을 소설 쓰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일상에서 문학적으로 버릴 거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제50회 동인문학상 수상자 최수철 소설가 수상 소감>
“받지 않는 전화를 오래 거는 것”이라고, “수신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울지라도 쓰는 사람 자체는 수신처가 있다는 자기 확신 아래 시도하고 실패하는 것”
<소설가 '김금희' 인터뷰>
"작가는 자기가 믿는 바를 써야 한다. 물론 그 믿음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편향된 시각을 가진 것은 아닌지, 철저한 자기 검열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건강해야 한다. 정신은 물론 몸과 가치관, 세계와 삶과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 모두."
<소설가 '정유정' 인터뷰>
"작가는 사회를 비판하는 관점에서 작품을 쓴다. 작품에서 사회를 비판할 때 작가는 의사의 입장이 되는 것 같다. 만약 1996년에 <형제>를 완성했더라면 의사의 입장에서 썼을 것이다. 그런데 2003년에 완성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우리 모두가 병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문제가 있고 나는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사회 문제에 각자 책임이 있다. 모든 사람이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모두가 병자이다."
<중국의 대문호 '위화'>
아래의 두 인터뷰 내용들은 소설가의 입장에서 소설을 독자들이 읽는 이유이다.
(저들은 전문가들이니까 저렇게 이야기하는 거고; 사실 크게 거창한 게 있을까? 재미와 배움이지 ^^;)
"나는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은밀하고 근원적인 두려움을 갖고 있다. 이런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떠날 기회를 만들어 자발적으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떠남과 두려움은 내 생활리듬에 반드시 필요하다."
<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
“현실에서는 도덕적 판단이 빨라 사람을 깊게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 소설은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땅’이라는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도덕적 판단을 미루고 인물을 접할 수 있기에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소설가 '김영하' 우리가 소설을 읽는 진짜 이유’란 주제로 열린 북콘서트 中>
소설가들의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결국 비슷한 맥락이다. 소설을 쓰는 행위는 단지 본인이 상상한 것을 글로 풀어내는 즐거움에 그치지 않고 사회에 대한 책임감으로, 독자에게 큰 깨달음을 주기 위해 쓰는 것 같다. 또한 독자들이 올바르게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기존에 익숙했던 틀에서 벗어나, 좀 더 다양한 시각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자신과 타인에게 얽힌 복잡한 매듭을 쉽게 풀어나가는 과정 같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