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남편이 내게 한국어를 물으면, 나는 마치 수수께끼를 푸는 기분이었다.
“모자 있잖아, 글씨 위에 모자 있는 거, 그거 뭐지?”
그 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자음 ‘ㅊ’. 남편 눈엔 ‘ㅈ’ 위에 선 하나가 마치 씌워 놓은 모자처럼 보였나 보다. 그렇게 한국어가 낯선 사람의 시선으로 다시 들리면, 나는 설명을 고민하며 머릿속을 헤집었다. 쉽고 편하게 묻는 남편의 말투 속에서, 나는 내가 가르치는 일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걸 어느 순간 깨달았다. 아이 둘을 키우며 말하는 방식도 자연스레 달라졌고, 어린아이에게 말하듯 조심스럽고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습관은 어느새 내 삶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어떤 날은 밥을 먹다가, 또 어떤 날은 TV를 보다가 남편이 불쑥 물었다.
“이건 무슨 뜻이야?”
나는 습관처럼 대답했고, 그 일이 반복되다 보니 ‘가르친다’는 감각이 내 안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설명하는 일이 재미있었다. 남편이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마다 뿌듯함이 따라왔고, 그게 반복될수록 나도 모르게 점점 이 일에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 처음, '나중에 우즈베크에 가게 된다면 뭘 하며 살 수 있을까?'라는 막연했던 질문에, ‘한국어 선생님’이라는 대답이 조용히 떠올랐다. 외국인 사촌 덕분에 세종학당이라는 기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강의를 하려면 한국어 교원 자격증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지 가능성 하나를 열어두기 위해 시작한 공부였지만, 알고 보니 그 길은 생각보다 훨씬 길고 복잡한 여정이었다.
나는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했고, 다행히 일부 과목이 겹쳐져 다른 사람보다는 조금 수월할 수 있겠다 싶었지만, 막상 시작해 보니 그렇지 않았다. 육아와 살림, 생계까지 병행하며 공부를 이어가야 했고, 그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자격증을 따는 데는 꼬박 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틈틈이 강의를 듣고, 리포트를 쓰고, 시험을 치르는 일은 결코 가볍지 않았고, 중간에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여러 번 있었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실습까지 해야 했는데 진짜 외국인 학생들 앞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수업이었고 처음엔 너무 부담스러워 매일 잠을 설치고, 꿈까지 꾸었을 정도, 여기에
수업 자료도 내가 다 준비해야 했고, 나눠줄 프린트도 직접 만들어야 했으니 그 압박은 예상보다 훨씬 컸다. ‘내가 왜 이걸 시작했을까…’
후회가 밀려들던 시점도 분명히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수업이 끝나자 그 모든 과정이 한순간에 빛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짧은 수업이었지만 학생들이 나를 따라 말하고, 내 설명에 반응하는 걸 보며 처음 느껴보는 성취감이 올라왔다. 그때야말로, 마음 깊이 “잘했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건넬 수 있었던 날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드디어 한국어 교원 자격 합격 소식을 들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이 공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어’라고 생각했던 적도 많았는데, 이번 과정을 겪으며 '세상에 쓸모없는 일은 없구나' 하는 걸 새삼 느꼈다.
지금까지의 경험들이 결국 이렇게 이어졌구나 싶은 생각이 들자, 내가 걸어온 길이 선명하게 연결되며 위로가 되었다.
당장 이 자격증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내 인생에 또 하나의 멋진 선으로 연결되리란 기대는 분명 있다. 지금은 식당일을 소소하게 도우며 아이도 키우고 있지만, 남편의 고향에서 작은 과외 모임이라도 열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은 삶일 것 같다. 무엇보다도 이 자격증이 내 손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예전 우즈베크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해 자존감 없이 지냈던 내게는 든든한 위로가 되어주는 기분.
아직도 영주권 시험을 준비 중인 남편을 보면 “한국어 자격증, 진짜 필요한 사람은 남편인데...” 싶어 웃음이 나오는데 남편에게 “내가 먼저 땄다”라고 놀리기도 하지만, 이제는 내가 더 잘 도와줄 수 있다는 생각에 흐뭇하기도 한 게 괜히 이 길을 시작한 게 아니었다는 마음도 함께 따라온다.
이제 남은 건, 나의 한국어에 어울리는 우즈벡어를 더 잘하게 되는 일.
그래야 진짜, 이 모든 여정이 닿을 곳까지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