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과 우울 사이에서, 나를 수선하는 작은 결심
30대 주부이자 워킹맘, 두 아이의 엄마이면서 사업하는 남편을 돕는 아내로 사는 하루는 빠듯하고 힘이 들지만, ‘이건 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한 문장으로 스스로를 달래며 여기까지 버텨왔다.
그런데 그 행복의 바닥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우울이 얇게 가라앉아 밤마다 나를 검색창 앞에 붙들어 두곤 한다.
‘우울 해결법’을 끝없이 두드리다 “너무 완벽하려고 하면 10년 뒤 우울증이 온다”는 문장을 보는 순간, 이유 없이 서운했다.
누구 탓도 하지 않으려 애써 온 나에게 그 문장이, 마치 성실했던 나날을 꾸짖는 목소리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큰딸과 왕복 세 시간 가까운 등하굣길을 다니고, 남편의 식당을 위해 사진을 찍고 부족하지만 짧은 영상도 만들고, 동시에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조금도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동안, 체력은 먼저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버티다 보니 어느새 남편에게 사소한 투정을 퍼붓는 날들이 잦아졌는데 남편은 늘 같은 목소리로 “다 잘될 거야”라고 말했고, 나는 시간의 힘으로 ‘잘되었던’ 순간들을 여러 번 보았음에도 오늘 눈앞의 벅참 앞에서는 그 믿음을 잡아당겨 품에 안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시간 기록 노트까지 만들어 분 단위로 하루를 쪼개 보기도 했는데, 해야 할 일과 꼭 해야 할 일이 서로 앞다투어 꼭대기를 바꾸는 산처럼 자라나는 것을 지켜보며 욕심이 많은 나는 어느 것 하나 내려놓지 못한 채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왜 나를 이렇게 몰아세우고 있을까’ 하는 자괴감 속에 더 깊이 들어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오랜만에 식당에 나가지 않고 쉬겠다며 “아이들이랑 물놀이 다녀올 테니, 자긴 하고 싶은 거 해”라고 말했다. 예전 같았으면 ‘나도 같이 가고 싶다’며 가벼운 소풍처럼 따라붙었을 테지만, 그날만큼은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정말 쉬자고 다짐한 그 순간에도 나는 또 장갑부터 끼고 있었다. 스스로도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저녁 무렵 남편이 “오늘은 맛있는 것 좀 사서 장모님 댁에 다녀올까?”라고 물었다. 낮에 조금 쉬었던 나는 기분 좋게 길을 나섰고, 친정에 도착하니 오랜만에 모인 식구들로 집 안이 가득했다. 친정엄마가 힘들까 싶어 우리는 가까운 곳에 나가서 먹고 오기로 했다. 그때 고모가 남편을 보며 “샤로프는 아주 총각 같아~” 하고 말했는데, 그 말이 내 귀에는 한편으로는 기분 좋게, 다른 한편으로는 서늘하게 꽂혔다. 내 머리카락에는 흰빛이 하나둘 섞이기 시작했고, 부러진 사랑니를 뺄 시간조차 미뤄둔 채, 늘어진 집 앞 원피스를 대충 걸치고 머리를 대충 묶은 내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는 남편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 것 같았다. 남편 식당에 놀러가면 어딘가 모르게 내 자신이 부끄러울 때가 있었는데, 그때의 감정들까지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리고 조용히 결심했다. 아무리 바빠도 나부터 가꾸자. 오늘 당장 시작할 수 있는 것부터, 아주 작게라도.
다음 날 아침, 남편이 “내일은 내가 큰딸 학교 데려갈게, 자긴 좀 쉬어”라고 다시 한 번 말했을 때, 그렇게 가게에 빠져도 되나 싶었지만 이번만은 그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둘째를 유치원에 보내자마자 미뤄두었던 치과에 가서 전체 검진과 스케일링을 받았다. 시린 이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려 보며 ‘이 시원함을 왜 이렇게 오래 미뤄두었나’ 싶어 절로 미소가 났다.
돌아오는 길, 올리브영 진열대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직원의 도움을 받아 비비크림을 고르고, 오래전부터 맞지 않던 제품은 과감히 내려놓았다. 아이들이 밟아 자꾸 흘러내리던 안경이 떠올라 안경집으로 가 나사를 조이고 알을 갈았고, 내친김에 렌즈도 새로 맞췄다. 길모퉁이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들고 나오며, 올리브영에서 망설였던 아이라이너와 빗은 다이소에서 담아 나왔다. 역시 알뜰살뜰 주부 티는 못 버리는군, 하면서도 내가 싫지 않은 하루였다.
영수증을 모두 모아 왔지만 오늘 내가 나에게 얼마를 썼는지 계산하지는 않았다. 대신 집에 돌아와 늘 하던 대로 라면을 끓이려던 손을 멈추고 과일을 꺼내 한 접시 담아, 커피와 함께 천천히 씹어 먹으며 지금 이 글을—내가 좋아하는 바로 이곳, 내 방 책상에서—쓰고 있다.
이따가 둘째를 데려와 남편 가게로 가 남편을 만날 것이다. 그때부터는 다시 나의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오늘 반나절이라는 시간은 마음 한 칸을 비워내고 빛을 들이는 데 충분했다. 다음에 또 힘들어지면, 오늘처럼 다시 나를 챙기면 된다는 것을 조용히 확인했다. 그때는 투정이 아니라 남편에게 예쁘게 이야기해야지.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를 좋아할 수 있도록,
나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나부터 가꾸기로 했다.
요즘 나는 분명 행복하다.(셀프 가스라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