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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지 않는 마음에 대하여

6살 아이와 나, 그리고 관계의 온도

by kelin

요즘 아이의 말을 듣다 보면 내가 먼저 울컥할 때가 있다.

“엄마, 오늘은 ○○가 나랑 안 논대.”

라는 짧은 한 문장 속에 또렷하게 배어 있는 외로움이

어쩐지 내 과거의 감각을 깨우고, 오래전에 접어 두었던 장면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친구가 많았던 유년기였지만, 나는 누군가를 괴롭히기도 했고, 반대로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으며, 어떤 날엔 그냥 보고만 서 있던 방관자가 되기도 했다.

마음이 다치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지 몰라 망설이던 그 시절을 지나, 크게 문제를 일으키진 않았으나 관계라는 세계 앞에서 조금은 불안하고 조금은 서툰 채로 자라왔다.


결혼 후부터는 사람이 많은 자리가 유독 버거워졌는데 운동회 날, 엄마들이 한데 모여 웃으며 수다를 떠는 풍경 속에서 나는 늘 바깥쪽을 돌았고, 아이 사진을 찍는 손과 마음은 자꾸만 흔들렸다.

아이가 잘 지내는 게 맞는지,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작은 의심과 근심들이 하루의 리듬을 가볍게 흔들었다. 아이에게는 처음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단짝’이라 부르는 친구가 있었고, 유치원에서도 태권도장에서도 함께 웃던 사이라 안심했는데, 언젠가부터 그 무리에 아이가 설 자리가 조금씩 좁아지는 듯했다.

새로운 친구 두 명이 들어오고, 그 아이들은 태권도가 끝나면 공부방으로 함께 이동하며 더 단단한 삼각형이 되었다.

“엄마, 오늘은 친구들이 나만 빼고 속닥거렸어.” 아이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뒤로 등원을 망설이는 아침이 늘어났고, 태권도도 가기 싫다며 고개를 저었다. 늘 밝고 씩씩하던 아이였기에 선생님과 상담도 해보았지만, “아무래도 하원 후 같은 학원에서 시간을 같이 보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더 가까워지는 것 같다.”는 선생님의 말씀.

태권도 역시 그런 ‘간극’을 메우려고 보냈던 것인데, 아이의 발걸음은 오히려 더 무거워졌다.

유치원 친구들 대부분이 태권도에 이어 공부방까지 함께 가기 시작하자, ‘공부방에 가지 않는 아이’라는 사실이 또 다른 경계가 되어 아이를 무리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정말 왜 무리 속에서 존재감을 증명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혼자 살 수 없는 세상’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 관계가 어떤 날에는 아이의 마음을 닫히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를 선택한 것이었는데..

아이 곁에 조금 더 오래 머물며 지켜보기 위해서였고, 감사하게도 그 선택은 내 시간을 아이 쪽으로 더 움직일 수 있는 여지를 주었지만, 아이를 품에 두고 있다고 해서 불안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무리 안에 넣지 않으면 따돌림을 당하지 않을까, 그 상처가 굳어서 나처럼 트라우마가 되면 어쩌나, 혹시 나를 닮아 사람 많은 곳을 힘들어하는 성향을 내가 더 키우는 건 아닐까’ 같은 질문들이 자주 고개를 들었다.


나는 엄마이기 이전에, 혼자 있는 시간을 사랑하는 한 사람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나만의 생각과 계획을 정리한 뒤 남은 여가는 가족과 보내는 삶이 내게는 가장 자연스럽고, 그래서 엄마들 모임에 억지로 섞이지 않으려 애쓴 날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이 혹시 학원이나 무리에서 소외로 되돌아오는 건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될 때면, 아이와 함께할 시간이 늘어난 감사함과 매일의 선택 앞에서 흔들리는 마음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학원을 보낼까 말까, 오늘은 쉬게 할까, 아니면 억지로라도 보내야 할까.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차라리 우리 둘 다 외향적인 사람이 되어버리면 겉보기엔 훨씬 수월하겠지’라는 상상도 해보지만, 그렇게 꾸며진 그럴싸함을 유지하는 동안 정작 우리 안의 결이 사라질까 두려워 결국 멈칫하게 된다.

또 어떤 날엔 모든 걸 다 그만두고 싶다. 유치원도, 학원도, 그 복잡한 엄마 사회도,

싫다는데 굳이 계속해야 할 이유를 한참이나 찾다가 지쳐버리는 밤도 있다. 그럴 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우즈벡으로 언젠가 이민 가면 그만이지.” 누군가에겐 도피처럼 보일지 몰라도, 내게 그 문장은 그동안의 시간 속에서 스스로 깎아 만든 ‘숨 쉴 구멍’ 같은 것이다. 국제결혼을 하고 나니 이곳에서는 종종 이방인 같은 감각이 찾아오고, 그곳에 가면 또 다른 낯섦이 기다리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두 경계 사이에 서 있다는 사실이 나를 버티게 한다.

돌아갈 곳이 있다고 믿거나, 떠날 수 있다는 여유를 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단단히 굳어버리지 않으니, 그 가능성이 내 일상을 조금 덜 조여준다.


생각해보면 아이의 세계는 아직 아주 작고, 그래서 더 빨리 변한다.

오늘의 “너랑 안 놀 거야”가 내일의 “같이 놀자”로 바뀌는 데 하루면 충분하다는 것을, 아이들을 오래 지켜본 어른들은 알고 있다.

관계는 고정된 돌이 아니라 손바닥의 물처럼 모였다 흩어지고, 결국 남는 건 함께 웃던 장면 몇 개뿐일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젖은 흙과 닮아서 누군가 밟고 지나가면 자국이 선명히 남지만, 시간이 지나 햇빛과 바람이 드나들면 다시 부드러워지기도 한다.

나는 그 흙이 너무 단단히 굳어버리지 않도록, 매일 아주 조금의 햇살을 비추는 엄마로 살고 싶다.


아직도 어디까지가 아이를 위한 선택이고, 어디서부터가 나의 불안인지 그 경계를 명확히 가르기란 여전히 어렵지만,

좋은 부모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오히려 나를 더 조급하게 만들 때가 있고, 그 조급함이 아이에게 전해질까 봐 스스로를 자주 다잡고 있는데

그래서 요즘의 나는 아이를 다독이며, 아이 마음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고 싶어 관련된 책을 찾아 읽고, 그렇게 하루를 흘려보낸다.

거창한 답을 찾기보다,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을 아이와 함께 천천히 지나가는 일, 그것이 전부인 듯하다.

그럼에도 확실하게 믿고 있는 것이 있다. 아이가 세상 속에서 조금 다치고 돌아오는 날이 오더라도, 그 옆에 내가 서 있다면 그 마음은 결코 굳어버리지 않을 거라는 것. 어쩌면 그것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완벽한 해답 대신 하루의 온도를 고르고, 불안한 마음 속에서도 흔들리는 발걸음으로 다시 아이의 손을 잡는다. 그 단순한 행동이 지금의 나를 지탱한다.

오늘도 나는 아이의 마음 곁에서 배운다.

흔들림은 실패가 아니라 성장의 한 과정이라는 것을, 그리고 살아 있다는 증거는 단단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부드러워질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이 글을 쓰며 그런 마음을 다시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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