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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류 Jun 19. 2023

날마다 여행 중입니다.

2. 길섶과 사람들........

길섶에 식물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날 사십 대의 젊은 부부가 길섶의 식물들처럼 그곳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부부가 함께이기도 하고, 어느 날은 남자 혼자이기도 했었지만 여자가 혼자였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남자가 혼자인 날에 '혹시 아내가 아프기라도 하나?'라는 걱정을 하는 것은 이 무슨 오지랖인가 싶다.

그리고 그들은 길섶에서 자라는 식물들과 함께 길섶의 또 다른 주인이 되어버렸다.

그들이 처음 길섶에 모습을 보인 건 아마도 작년 가을쯤이었을 것이다.

내가 그들과 주치는 시간보통은 오후의 비슷한 시간인데 그들은 팔 물건들을 길섶의 풀들과 협상이라도 한 듯 길섶과 차도를 구분해주고 있는 제법 넓은 경계턱 위에 가지런하게 쌓아놓고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


정지신호가 들어오는 순간 그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진다.

애써 말들이 오가지 않아도 권유와 결국은 거절의 메시지가 상존하리라는 것을 서로가 익히 알고 있지만 그들은 창을 내려줄 것을 요구하고, 그저 모른 척 딴청 부리고 있기가 민망해서 소심하게 차창을 내리면 그는 물건의 가격만 손가락으로 알려주며 그것을 툭 건네고 잽싸게 다른 차량으로 이동을 한다.

그들의  물건을 얼떨결에 손에 쥔 사람들은 스스로 그 물건에 대한 판단을 해야 하는 조금 당황스러운 순간을 맞게 된다.

행여 정지신호가 풀려 차가 훅 떠나버린다면 돈도 물건도 챙기지 못할 텐데... 하는 걱정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정지신호가 끝나는 시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고, 물건을 웬만큼 나눠준 뒤에는 물건값을 받거나 물건을 회수한다.


내가 일 년 가까이 그곳을 지나면서 샀던 그의 물건이 코털 뽑기와 삼베이 등 옛날과자가 대부분이었던 것을 보면 그가 자신의 물건 대신 돈을 받는 경우는 흔치 않은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지못해 물건을 손에 쥐고 있다가 그가 나타나면 고개를 흔들며 재빨리 그에게 돌려주고 창을 내려버린다.

그때 사람들의 표정은 대부분 사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불편함을 담고 있다.


처음 그들을 길섶에서 만났을 때 나는 그들의 손짖에 따라 차창을 망설임 없이 내렸었다.

왠지 유리창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묘한 의무감과 약간의 호기심이 발동하면서..

어떤 경우든 거절이란 것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내가 왜 몰랐겠는가.

그런데  차창을 내리면서 불과 삼십 센티의 간격도 두지 않은 거리에서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거절의사를 전한다는 게 사실은 굉장히 불편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소심하게 거절하고는 그 민망함에서 벗어나고파  어서 신호등이 바뀌어 이 자리를 뜰 수 있기를 기다리는데 초록불은 왜 그리도 더딘지...


단지 얇은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인데도 차창을 닫고 거절하는 것과 차창을 열고 거절하는 것은 엄청난 온도 차이가 있다.

상대방의 눈빛을 유리창이라는 여과기능이 없이 마주한 채로 거절할 때는 왠지 그 물건을 사지 않는 것이

내 잘못인양 민망하지만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선 그런 기분이 들지 않는다.

사실 전자나 후자나 뭐 그리 차이가 있을랴만 나는 유리창이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할 때는 웬만큼 뻔뻔해질 수가 있다.

이젠 더한 요령이 생겨서 그들이 다가와도 그냥 못 본 척 외면하거나 딴 청을 부린다. 예를 들면 전화기를 들고 급한 통화를 하고 있는 것처럼.......

어쩌면 외면이라기보다는 차창 밖의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는 게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설사 차창을 두들기는 그의 요구가 끈질겨도 차창을 내리지 않고 그냥 고개를 저어버리는데 그게 참...




그들이 판매하는 물건은 대부분은 거의 매일 바뀐다.

마치 길섶 안에 잡화상이라도 숨겨놓고 있는 것처럼 파는 물건도 참으로 다양하다.

어느 날은 옛날과자나 뻥튀기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진 생활용품이 많다.

가격대는 주로 두 개에 만원이라든가, 두 개에 오천 원, 이런 식의 묶음으로 되어 있다.

실내에 맑은 향기를 분사시켜 준다는 아로마향기를 두 개에 단돈 만원이라는 글씨가 크게 적힌 골판지를 목걸이처럼 목에 걸고 있는데 그런 날은 대개 날씨가 우중중한 날이다.

비가 내리는 날에도 그는 빗물이 흘러내리는 차창을 젖은 손으로 두드리며 무언가를 보여주는데 비 오는 날에 필요한 우산이 아니라 원색의 명도가 너무 강해서 촌스러운 느낌이 드는 파라솔이었다.

그리고 그가 챙이 커다란 밀짚모자를 파는 날은 뜨거운 여름날이 아니라 봄꽃잎들이 꽃비처럼 내리던 날이었다.

그런데 참 묘한 것이 그의 역발상(?)이 사람들에게 먹혀든다는 것이다.




여름이 시작되면서 길섶에 또 다른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곳에 가꿀 밭이 어디 있던가 싶은데 그들을 보면 한눈에 농사를 짓기 위한 차림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름볕에 노출되지 않게 온몸과 얼굴을 칭칭 둘러싸 매고 손에 삽과 호미, 그리고 무엇인가가 들어있을 검은 봉지를 들고 있다.

굳이 구분을 하자면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길의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길섶의 사람들이다.

남자는 여러 풀들이 서로 어깨를 기대고 자라고 있는 좁은 길섶의 흙들을 노련한 삽질로 파 뒤집고,

여자는 남자가 뒤집어 놓은 흙더미에 발을 묻고 있는 풀들을 인정사정없이 뽑아 한쪽으로 던져버린다.

풀들의 자지러지는 비명이 내 귀에 이명처럼 박힌다.

나는 안다.

그들이 자신들의 기르는 식물을 위해 길섶의 주인인 작은 풀들을 죄다 뽑아버린다는 것을........

그들은 크고 작은 풀들이 이 길섶의 주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어느 날,

차를 한적한 길목에 세워두고 길섶으로 걸어가 봤다.

사람들의 침범이 없을 때는 질서는 없었지만 풀꽃들이 나름대로 순서를 지켜가며 꽃을 피워내던 그 소박한 길섶이 가르마를 탄 듯 이랑이 생기고 그 위에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키가 작은 식물들이 도열하는 군인들처럼 질서 있게 자라고 있었다.

그 작은 녀석들이 나름 사랑스러웠지만 녀석들로 인해 터줏대감이던 풀들이 잔인하게 뽑혀 길섶 한 귀퉁이에 누워 미라처럼 말라가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괜한 심술이 났다.

누가 볼세라 재빠르게 작은 녀석들 머리통을 발로 차 보지만 이 녀석들이 무슨 죄가 있으랴.

풀들의 터를 차지한 인간의 욕심이 유죄가 아니던가.

이제 길섶은

능숙하게 차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물건을 파는 사람과

길섶을 기르는 식물로 가득 채워 놓은 사람과 그가 기르는 식물들,

그리고 서로 어깨를 기대고 깔깔거리던 많은 벗을 잃어버렸지만 꿋꿋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기르지 않는 식물들이 함께 하고 있다.




어쨌든 부부는 이제 길섶과 함께 떠오르는 사람들이다.

어느 날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작은 걱정도 하는 것을 보면 그만큼 길섶의 부부가 내게 익숙함을 넘어 친숙함이 되어버렸던가보다.

먼지 낀 길섶의 익숙한 것들 사이로 낯선 것들이 들어서고, 그것들이 다시 익숙함이 되었다.

능숙하다지만 그래도 위험한 상황이 될 수도 있는 차량 사이를 뛰어다니며 물건을 파는 부부의 익숙함과 나는 그만 작별하고 싶다.

그들이 여기서 성실하게 돈을 모아 서로 비켜설만한 공간마저도 되지 않을지라도 편히 앉아 자동차 매연과 먼지 속에서 식은 도시락이 아닌 밥솥에서 갓지어낸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는 그런 작은 가게라도 하나 마련했으면 좋겠다.

아이들의 밝은 웃음소리에 행복하게 웃는 그들의 모습을 그려보며 혼자 슬며시 웃어본다.


그리고 그들이 머물렀던 길섶엔 또 다른 가난하고 소박한 사람들이 그들의 터를 잡기 위해 잠시 머물다 가는 그런 소중한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 길섶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그런 자리가 되고,

기르지 않는 식물들이 마음 놓고 자랄 수 있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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