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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류 May 22. 2023

그리움이라는 성장통을 앓는 중입니다.

어머니의 은비녀

그날은 특별한 일이 없었음에도 어머니 집에 가고 싶었다.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듯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주인을 잃은 어머니의 집은 조금씩 낡아가면서 부스럼을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주인을 잃은 어머니의 화단에서는 꽃들이 봄볕에 몸을 말리며 말갛게 웃고 있었다. 

수선화 몇 송이를 꺾어 유리병에 담아 어머니의 낡은 경대 위에 놓으면서 무심결에 서랍을 열어보니 어머니가 생전에 쓰시던 물건들이 오붓이 담겨 있다.

한쪽 다리가 부러져 무명실을 걸어 쓰시던 돋보기,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 윤기가 나는 참빗, 이런저런 자잘한 것들 너머로 누런 천 꾸러미가 보여 꺼내어 풀다가 난 그만 흠칫 놀라 손을 떨구고야 말았다. 

색색의 자수꽃들 사이로 군데군데 검은 얼룩이 묻어있는 누런 광목천은 오래전 둘째 언니가 죽던 날 어머니의 수틀에 있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 꽁꽁 숨겨져 있는 것은 생전에 쓰시던 어머니의 은비녀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그리움보다는 온몸에 소름이 이는 무서움증이 일어 나는 문을 박차고 나와 차의 운전대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었다. 

어머니와 언니는 아직 여기에 있었구나. 이 구석지고 어두운 곳에...

그때 언뜻 스치는 생각이 있어 핸드폰을 열어 날짜를 보니 오늘이 3월 6일, 바로 언니의 기일이다. 그래서였구나. 오늘 둘째 언니가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는 것에 생각이 모아지면서 비로소 나는 다시 어머니의 방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어머니에게 이 은비녀는 단순히 쪽진 머리를 고정시키기 위한 장신구만이 아니었다. 당신의 둘째 딸이었다. 수선화처럼 여리고 고운 모습으로 피었다가 서른셋의 나이에 간암이라는 무서운 죽음의 고삐에 끌려 어두운 땅 속으로 사라져 갔던 당신의 둘째 딸... 

자식이란 이름이 그저 기쁨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머니에게 알려주고 일찍이 떠난 그 둘째 딸... 

세월과 망각이라는 이름 앞에서도 어머니에게는 결코 놓을 수 없었던 그 둘째 딸이었다.

어느 날 그 둘째 딸은 복수가 가득 차 개구리 배처럼 부푼 배를 안고 친정집에 들러 어머니의 하얗게 센 머리를 곱게 빗겨드리고 가방에서 은비녀를 꺼내 쪽을 지어 드렸다. 약지보다 조금 더 두툼했고, 머리 쪽에 자잘한 꽃들이 새겨진 참 고운 은비녀였다. 그리고 그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 둘째 딸은 피를 한 대야나 토하고 그 질긴 고통의 끈을 놓았다. 

언니가 죽었다는 연락이 왔을 때 흰 광목천에 수를 놓고 계시던 어머니는 으헉 하는 신음 한 자락을 길게 내뱉고는 그만 당신의 수틀에 얼굴을 묻으셨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머니가 얼굴을 들었을 때는 바늘에 찔린 손가락에서 나온 피가 흰 광목천을 빨간 꽃밭으로 만들어 버렸고, 어머니의 눈은 그보다도 더 빨갛게 충혈되어 금세라도 툭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어머니는 울지 않으셨다. 바늘에 찔려 아직도 붉은 피가 몽실몽실 솟아나고 있는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 힘껏 피를 빨아 삼킨 뒤 수틀에 새 광목천을 갈아 끼우고 다시 수를 놓기 시작하셨다. 

방금 자식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은 어미의 모습이 아니었다. 

매정하신 분, 아직 꽃 같은 나이의 제 자식이 죽었다는데 어찌 저리 꽃수만 놓고 계시는 걸까...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한 채 시간은 흘렀고, 죽은 언니에 대한 슬픔이 그리움으로 변해가던 어느 새벽에 오줌이 마려운 나는 대문께 변소까지 가기가 귀찮아 장독대 뒤로 돌아가다가 무언가 컥컥거리는 소리에 흠칫 발길을 멈췄다. 

무서움을 애써 다독이며 조심조심 다가가 보니 누군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흐느껴 우는데 그 소리가 심장을 쥐어짜는 듯 어찌나 처절하던지 새끼를 잃은 어미의 피를 토해내는 절규와도 같아서 내 눈에서도 대책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오줌이 마려운 것도 잊어버린 채 벽기둥에 기대어 숨어 훌쩍거리다가 이내 그 울음소리의 주인공이 어머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던 어머니가 언제 그랬냐는 듯 홀연히 일어서서 장독 위에 정화수를 올려놓은 뒤, 두 손을 마주 잡고 기도인 듯, 혼잣말인 듯 웅얼웅얼거리시는 것을 보고 나는 재빨리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 뒤에도 새벽녘에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몇 번 보았고, 그리고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러서야 나는 그것이 딸을 잃은 어미의 본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통의 끈을 놓고 좋은 세상으로 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나 다른 자식들 앞에서는 그렇게 우기면서도 어머니는 딸을 먼저 보낸 몹쓸 어미라는 자책으로 아무리 덜어내고 퍼내어도 아프고 시린 커다란 바윗돌 하나를 당신 가슴에 추처럼 달아 놓고 자신에게 날이 선 칼날을 들이미신 것이다.

언니가 떠난 후 그 은비녀는 어머니에게 몸의 일부였다. 

한 순간도 당신에게서 떼어놓지 않았던 어머니가 폐 한쪽에 시커먼 암 덩어리가 생겨 병원에 입원하시면서 이제 더는 당신의 쪽진 낭자머리를 감당하기 힘드셨는지 머리를 자르겠다며 당신 스스로 은비녀를 뽑아내셨다. 어머니의 쪽진 머리에서 은비녀가 뽑아지고, 날렵한 가위질에 당신의 흰머리가 잘려 나갈 때 행여 어머니는 당신 가슴에서 둘째 딸도 그렇듯 잘려 나간다고 생각하셨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후 어머니는 말씀을 무척 아끼셨다. 

우리 자매들은 어머니가 떠날 준비를 하시느라 말을 아끼는 것이라 생각하며 우리 또한 어머니 앞에서 말을 아꼈다. 어쩌면 어머니는 일곱 자식들과의 이별보다 당신 가슴에 묻어 둔 둘째 딸을 만날 수 있다는 당신의 기대를 우리에게 들킬까 봐 입을 닫으셨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머니가 떠나시던 날, 셋째 언니는 밤새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에 애써 웃음을 지으며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말했다. 

“엄마, 둘째 딸 만날 생각 하니 설레지?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하늘나라에 가셔서 둘째 딸 만나 그동안 못 준 사랑 듬뿍 주고 행복하게 지내요. 우리 만날 때까지...” 

순간 어머니의 얼굴에 거짓말처럼 수줍은 미소가 스쳐갔다. 

어머니는 첫사랑을 멀리서 훔쳐보는 소녀처럼 발그레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셨다. 

어머니가 떠난 뒤 나는 그 은비녀의 행방이 궁금했었는데 오늘 경대 서랍에서 보게 된 것이다. 은비녀를 곱게 품고 있던 그 광목천은 어머니가 내 베갯잇을 만들어주기 위해 꽃수를 놓던 것이었다. 

비록 내 베갯잇으로써의 제 역할을 하지는 못했지만 삼십여 년의 세월이 지난 뒤 내게로 와 내게 어머니의 은비녀를 선물한 것이다. 나는 그것을 품에 안고 나와 앞집 아재에게 라이터를 빌려 노란 수선화가 피어있는 화단 한 귀퉁이에 앉아 조심스럽게 불을 붙였다.

허연 연기가 실낱같이 피어오르며 꽃인 듯, 나비인 듯 너울너울 춤을 추며 흩어진다. 연기를 쫓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너울너울 춤을 추는 것은 광목천속의 꽃과 나비만이 아니었다. 

하얀 옷을 입은 두 여인이 함박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가고 있었다. 나도 마주 손을 흔드느라 잡고 있던 마지막 남은 천 조각을 그만 떨구고 말았다.

내가 꿈을 꾼 것일까. 

반 줌도 안 되는 허연 재를 남긴 채 어머니의 설움과 꽃수를 담은 광목천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것들을 조심스레 모아 수선화 꽃그늘 아래 묻어두고 나는 서둘러 내 집으로 돌아왔다.

큰일을 치른 듯 온몸이 나른해왔지만 나는 가방에서 어머니의 은비녀를 꺼내 부드러운 천에 치약을 묻혀 정성스럽게 닦고 또 닦은 뒤 몇 해 전 들꽃자수를 배울 때 만들어뒀던 하얀 가제손수건에 곱게 싸서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경대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이 은비녀가 어머니에게는 아픔이었지만, 

내게는 회오리 같은 그리움, 때로는 처연한 아픔이 되어 나를 휘청거리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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