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니의 꿈을 훔쳐먹고 자랐다.
적어도 난 우리 형제자매 중에 셋째 언니가 가장 잘 살거라 의심치 않았었다.
우리 여덟 형제 중에 그 누구보다도 마음씀이 곱고 손끝이 야물고 단정할 뿐만 아니라
부지런하기까지 했으니까....
그런데 그렇지가 못했다.
둘째 언니야 서른셋에 세상을 놔버렸으니 어찌 생각하면 병들어 고통스러운 생명줄을 질기게 이어가며
마음까지 병 들어가는 것보다는 그 줄을 놔버림이 그녀에겐 행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떠나간 둘째 언니를 빼곤 셋째 언니는 우리 여덟 형제 중 사는 게 늘 각박하고 위태롭다.
곤궁한 거야 굳이 불행이 아니랄 수도 있으나 일정한 시간을 두고 삶의 고비가 막아서는데 그것들이
유독 언니를 힘겹게 하고 내 맘을 아프게 한다.
난 오랜 시간을 셋째 언니에게 내 유년시절을 유린당했다고 생각하며 깊은 원망을 했던 적이 있었다.
나와는 나이차가 열 살도 넘게 차이가 나는 언니는 그 시대의 우리의 언니나 누이들이 그렇듯이
겨우 중학교를 마치고 이 땅의 딸로 태어난 죄로 하고 싶은 공부를 접고 밑으로 줄줄이 있는 동생들을 위해
돈벌이를 해야만 했다.
어디 학교 다닐때인들 제대로 다녔겠는가.
당신의 유희에만 빠져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놔버린 아버지 때문에 살림을 꾸려가는 것은 죄다 어머니몫이
되어서 언니는 바쁜 농삿철에는 학교에 가는 날보다 들에 나가 일을 해야 하는 날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 시대 딸들이라면 누구랄 것도 없는 것인데 그게 내 언니에겐들 어찌 비켜갔겠는가.
계집애가 공부 잘하는 것이 큰 자랑이 아니던 시절에 계집애는 중학이나 마치면 집안일 거들다가 적당한
혼처가 나오면 시집 잘 가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던 시절에 딸들의 배움의 길에 손을 잡아주고 응원을 해 주는 부모가 얼마나 있었겠는가.
여자에게 배움의 길은 유독 멀고 힘든 일이었던 시절이었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수많은 딸들이 그들의 오라버니나 동생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도시의 가발공장이나
봉제공장으로 떠나 밀려오는 잠을 참느라 꼬박꼬박 졸면서 재봉틀을 돌려대며 바늘이 천공기처럼 비쩍 마른 손등을 찍어대는 아픔을 참아가고 지하의 곰팡내 나는 가발공장에서 폐병환자 같은 마른기침을 쿨럭이며
뼈 품을 팔던 그 시절에 형제자매의 학비를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나는 것은 그 시대 딸들의 숙명이었다.
그 시절 그 딸들의 그런 희생이 없었다면 어찌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설 수 있었겠는가.
내 언니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 명석한 머리를 가지고도 중학을 마치자마자 상급학교로의 진학의 꿈을 접고
도시로 올라가 버스안내양이 되었고 박봉의 월급을 먹고 싶은 것 참아가며 꼬박꼬박 모아 어머니에게 전답을 마련해 드렸고 언니 월급의 일부는 나를 위해 쓰여
나는 도시 아이들이나 입을 수 있었던 좋은 옷, 좋은 신발, 좋은 가방을 들 수 있었고
상고머리가 태반이던 때에 도시아이들이 하고 다니는 짧은 커트머리도 그 누구보다 먼저 할 수 있었다.
그 시절 언니는 내게 원하는 것은 뭐든 척척 이루게 해주는 요술램프 속의 지니와 같았다.
적어도 그때까진 그랬었다.
그 요술램프가 깨진 것은 그간 어머니를 대신해 살림을 꾸려가던 큰 언니가 시집을 가고
어머니의 호출에 버스안내양을 그만두고 셋째 언니가 그 자리에 앉으면서부터였다.
사는데 바빠 마흔이 넘어 낳은 당신의 막내딸에게 미처 당신의 자근자근한 정마저도 내보일 수 없었던
늙은 어머니가 있었다면 언니는 내게 또 다른 젊은 엄마였다.
그것도 아주 극성스러운.....
지금 생각해 보면 자신의 가난을 자식들에게는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부모들처럼 언니도 어쩌면 자신의
궁색했던 유년시절에 대한 한을 '막냇동생'인 나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언니는 집안살림을 꾸려가는 틈틈이 동네의 바쁜 일손을 거들어 품삯을 받곤 했는데 그 쓰임은 버스안내양을 할 때와 크게 달라질 것이 없어 대부분 내게 쓰였다.
그러면서 언니는 자신이 내게 제공한 것들로 인해 나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양
나를 자신의 방식으로 길들여가기 시작했다.
덕분에 난 학교가 파하기 바쁘게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물론이었고, 친구들과 어울려서 논다거나 하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언젠가는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친구 몇몇이 나물을 캐러 가자는 약속을 하는 걸 듣고 나도 가고
싶은 생각에 부러움에 가득 찬 눈길만을 발끝에 보내며 애꿎은 땅만 툭툭 차며 집으로 왔는데 마침 언니가
집에 없어 이게 웬 횡재냐며 바구니와 칼을 챙겨 친구들을 따라 나물을 캐러 갔던 적이 있었다.
나물 캐는 게 익숙한 친구들과는 다르게 처음으로 나물을 캐 보는 내 기쁨은 나물바구니를 챙겨 집에서 나서는 순간에 벌써 나물바구니를 차고 넘쳐버렸다는 것을 누가 알랴.
삼분의 일쯤이나 채워진 나물바구니를 들고 나름대로는 어쩌면 언니도 이렇게 나물을 캐논 나를 칭찬할지도 모른다는 작은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집으로 갔는데 대문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언니는 내 나물바구니를 낚아채더니 누가 너더러 이딴 거 캐오랬냐며 마치 몹쓸 쓰레기 버리듯 그대로 두엄더미에 쏟아버렸다.
그리고 이내 내게 손을 내밀게 하고 탱자나무로 만든 회초리로 때리는데
언니는 그때 알았을까.
내가 그날 그토록 섧게 울었던 것은 매 맞아 벌겋게 부어오른 손바닥이 아파서가 아니라
내 작은 기쁨을 그렇게 아무 망설임 없이 두엄더미에 부어버리던
언니의 그 매몰참과 두엄더미에 묻혀버린 내 작은 기쁨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렇게 내 유년은 흘러갔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언니의 손에 의해 깨끗이 씻겨져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그날의 숙제부터 시작해 교과서를 펴놓고 예습, 복습을 해야 했고 언니가 도시 아주 큰 서점을 하던
숙부님에게 편지를 써서 소포로 받은 고전이나 위인전을 읽어야 했다.
마음은 골목에서 뛰어노는 친구들의 함성소리에 보내놓고 내 작은 몸뚱이는 책상 앞에 병풍처럼 그렇게
있어야 했다.
언니에게는 그것이 나를 향한 사랑과 관심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자유를 강탈당한 감옥이었고 지독한 구속이며 간섭이었다.
언니는 내 유년의 시간들을 내게서 그렇게 강탈해 버린 것이다.
지금도 난 내 유년의 기억을 들추어보면 친구들과 뛰놀던 기억보다는 언니의 지독한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전전긍긍하던 내 모습과 언니가 무서워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있던 내 모습만이 떠오를 뿐이다.
집안일에 바빠 그저 틈틈이 문을 열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나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분주했던
언니는 몰랐을 것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내가 들고 있는 교과서의 페이지가 맨 처음 책상에 앉았을 때 펼치던 페이지에서
겨우 한 두 페이지 밖에 더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내 언니의 나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사랑은 그녀가 시집가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그녀는 내가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을 맞기 직전에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집을 떠났고
비로소 난 그 지독한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되었고
그 겨울에 처음으로 내 손으로 직접 내 단발머리를 감아보는 그 감격을 맛보게 되었다.
열다섯에 처음으로 내 머리를 내 손으로 감았다니 나에 대한 언니의 간섭과 집착이
어느 만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자유를 난 몸서리칠 만큼 만킥했다.
그토록 좋아하는 만화방에서도.....
이제는 내가 가방에 교과서 대신 만화책을 가득 넣고 와도 나무랄 사람이 없었고
'데미안' 대신 '차타레 부인의 사랑'이란 책을 읽어도 잔소리할 사람이 없었고
공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노트정리가 잘 되었는가 확인하는 사람도 없었으니...
그 시절 난 공부시간이고 쉬는 시간이고 할 것 없이 만화책을 보고 만화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
그래서 내 공책은 내가 그려대는 만화 그림들로 일주일도 못 되어 다 닳았다.
어느 날 내가 국어선생님에게 그 어떤 계기로 눈에 띄지 않았다면 난 지금쯤 곰팡내 나는
어느 지하방에서 니코틴에 찌들어 삼류만화나 그리는 그런 고단한 인생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난 지금의 나이가 되었고 언니에 대한 나의 오해는 내 나이 서른여섯까지 계속되었다.
내 유년을 언니에게 유린당했다는 오해.....
서른여섯이 되던 해,
처음으로 우리 집에서 자게 된 언니와 밤이 깊도록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내가 미처 알지 못한 셋째 언니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언니가 내 유년을 유린한 게 아니라 내가 언니의 청춘을, 언니의 꿈을 유린했었다는 것을....
어린 내가 아니었다면 언니는 도시에서 야간고등학교도 가고 싶었고
자기가 좋아하는 글공부도 하고 싶었다는 것을....
중학교 입학 때 내가 세이코 손목시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것도,
고등학교 입학 때 남들은 만져보지도 못한 파카만년필을,
벽돌색 몸뚱이에 눈빛 시린 스텐 뚜껑의 그 차가운 감촉에 내가 마냥 행복할 수 있었던 것도
다 희생이라는 무덤 속에 묻어버린 언니의 꽃다운 시간과 꿈의 희생에서였고,
그 만년필이 오랜 시간 언니의 품에서 그녀의 꿈을 위해 기다리던 것이었다는 것도...
그날 밤 난 진심으로 언니에게 사과를 했다.
언니에 대한 나의 교만한 오해에 대해,
언니의 꿈과 시간들을 내가 유린해 버린 것에 대해....
타인의 삶에 끼어들어 그 삶의 일부분을 훔쳐냈던 것은 언니가 아니라 나였었다.
언니의 결혼생활은 처음엔 웬만큼 여유로웠고 많이 행복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착한 사람은 착한 만큼 복을 받는구나 하는 생각을 언니를 보면서 했었다.
그런데 언니의 그런 안정된 행복은 결혼 5년 만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형부가 운수업을 시작하면서
깨지고 말았다.
어느 날 형부는 사람을 두 명씩이나 사망하게 하는 인사사고를 냈고......
몇 년의 고통스러운 시간이 흐르고 삼 남매를 둔 언니 가족은 다시 넉넉하지는 않지만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형부가 문제였다.
형부의 폐가 고장 난 것이다.
형부가 직장을 그만두고, 살던 집을 팔고, 형부의 목숨줄을 지키기 위해
언니의 모든 가족은 자신들의 꿈과 생활을 절반으로 뚝 잘라냈다.
단 10%의 가능성도 없다는 형부는 폐암 수술 후 언니의 지독한 사랑과 정성에 의해 세브란스 병원 의료진들에게 기적의 수술 차트를 남겨주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살아오고 있다.
발병 직후 생활을 온통 셋째 언니에게만 의지해야만 했던 것에서 벗어나 형부는 지금은 작은 회사에 다니며
가계에 조금의 도움을 보태고 있고 아이들도 나름대로 자신들의 터를 꾸리고 잘 살고 있어 언니를 기쁘게 하고 있다.
언니는 지금도 지친 몸을 이끌고 병원에서 식당차를 끌며 병실의 환자들에게 식사를 나르고 있을 것이다.
언니는 아직도 가난하지만 여전히 천사 같은 고운 마음으로 환자들의 한 끼 식사에
당신의 소중한 기도를 담아 건넨다.
그녀는,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