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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류 May 30. 2023

그리움이라는 성장통을 앓는 중입니다.

어머니의 씨앗물.........

벌써 오래전에 치웠어야 했었다.
처음에야 그곳이 가장 적당한 자리였었고, 어쩌면 집안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벌써 오래전에 마을에 수돗물이 공급되면서 그것은 천덕꾸러기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녹슨 펌프에 대한 집착은 유별나셔서 주변의 것들과 어울리지 않게 그것은 오랫동안 친정집 화단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벌써 형제들은 여러 차례 시커멓게 녹슨 펌프를 그만 치워버리자고 어머니를 설득하였으나 어머니의 고집은 여간 아니어서 병원에 여러 날동안 입원해 계시면서도 그것을 치우지 말 것을 당부하곤 하셨는데 어찌 된 일인지 당신 스스로 그것을 치워버리시길 원하셔 가족들이 다 모인 어느 해 아버지 생신 때 그것을 치웠다.


어머니께서 그토록 미련을 가졌던 그것은 대문 밖 골목에서 지나는 고물장사에 의해 제 몸이 거두어지길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녹이 슨 제 몸의 살점을 한점 한점 떼어내면서...

    



유년 시절,
그러니까 마을 샘에서 바가지두레박으로 물을 퍼올려 길어먹던 그 시절이다.
우리 집에 펌프라는 그 시커먼 녀석이 와서 처음으로 시원스레 물을 콸콸 쏟아낼 때의 그 놀라움과 기쁨은 많은 세월이 흘러버린 지금도 생생하다.
가난한 시골에서 목돈을 들여 마련한 것이니 소중한 것이야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였겠지만, 내 어머니의 펌프 사랑은 유난해서 기름칠을 한 걸레로 얼마나 닦고 애지중지 했던지 우리 집 펌프는 다른 집의 펌프보다 늘 윤기가 나곤 했었는데 그  펌프 옆에는 쓰임새가 분명하지 않는 작은 항아리가 불룩 나온 자신의 몸 안에 물을 가득 담고 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펌프가 있기 전에야 마을 우물에서 길러온 물을 담아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펌프질만 하면 시원한 물줄기가 콸콸 쏟아지는 터에 어머니께서 굳이 그 항아리에 늘 물을 가득 채워놓는 까닭을 어린 나는 알 수가 없었다.


펌프질을 하기엔 아직 키도 작고 힘이 부족한 나는 펌프질로 물을 뿜어내기가 쉽지 않아서 어쩌다 밖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놀다 들어온 날이면 쓰기 쉬운 그 항아리의 물로 땀에 젖은 몸을 씻느라 다 써버리곤 했었다.


그런 날이면 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어머니께서 버럭 화를 내시며
"씨앗물을 다 써버리면 어쩌냐..."라고 나를 나무라곤 하셨는데 나는 그때마다 돈으로 산 것도 아니고, 펌프질만 하면 콸콸 쏟아져 나오는 그깟 물 좀 쓴 게 뭐 그리 큰 잘못인가 하는 생각에 어머니가 원망스러웠다.



그날도 그랬었다.
모처럼 골목에서 친구들과 오자미 놀이를 하고 온몸이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되어 들어온 나는 어머니의 씨앗물을 남김없이 다 써버렸다.

저녁해가 산너머로 숨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당신의 그림자만큼이나 낮아진 지친 몸으로 들어오신 어머니는 늦은 저녁밥을 짓기 위해 양식이 담긴 함박지를 들고 우물가로 가시곤 이내 당신의 씨앗물이 담겨 있는 항아리가 텅 빈 채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것을 보시고선 새 물길을 끌어올릴 물씨를 써버리면 어떡하냐며 긴 한숨을 내쉬는데 어린 나이에도 어머니의 그 모습이 어찌나 지쳐 보이는지 어머니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는 미안함과 원망의 눈물을 훌쩍거리며 작은 양동이를 들고 마음샘에 가서 물을 길어왔다.


호된 야단이 있으리라는 생각에 마음을 졸였던 것과는 달리 늦은 저녁밥을 허겁지겁 먹는 나를 어머니는 가끔씩 바라보실 뿐 아무 말씀이 없었다.

친구들과 동네 뒷 산에서 놀다 뒤늦게 돌아온 오빠가 땟물이 줄줄 흐르던 얼굴을 씻고 채 방에 들어서기도 전에 어머니는 오빠와 나를 불러 조용히 말문을 여셨다.

"애들아, 내가 샘에 있는 항아리 물이 뭐 그리 소중하다고 그토록 끔찍이 여기는 게 이상하지?

세상에 흔해 빠진 게 물인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물이 아니라 그 물이 다른 큰 물길을 불러내는 씨앗물이기 때문이란다.

비록 너희들 눈에는 흔하디 흔한 그런 물이지만 그 씨앗물이 없고서는 거센 물줄기를 콸콸 쏟아내는 저 펌프도 아무런 쓸모가 없단다.

씨앗물이 없이는 펌프는 결코 아무런 물길도 불러올 수가 없거든.

씨앗이 있어야 봄에 땅에 씨앗을 뿌리고 가을에 추수를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란다.

엄마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엄마는 내 자식들이 저 항아리 속에 담긴 씨앗물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스스로가 더 큰 것도 중요하지만 그 큰 것을 만들어내는 근원도 몹시 중요하다고 엄마는 생각한단다.
나도 내 자식들에게 저런 씨앗물 같은 엄마가 되어주고 싶은데 그저 사는 것에 급급해 무심한 어미가 되어버려서 참으로 미안하구나.
부디 너희들은 너희들 자식에게나 세상에게 씨앗물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게 엄마 소원이란다."



그랬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 항아리 속의 물을 그토록 끔찍이 여기셨던 것이었다.
당신은 자식들에게 씨앗물이 되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과 한으로....
그 후로 나는 어머니가 집을 비운 날이면 항아리의 물을 대책 없이 써버리는 대신 항아리 속의 그 씨앗물이라는 것을 바가지에 퍼서 바삭 마른 펌프에 붓고 모둠발을 하고서 열심히 펌프질을 해보곤 했다.
어머니의 바램처럼 꼭 씨앗물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그렇지만 내가 마른 펌프에 부은 물씨는 거센 물길을 불러오기는커녕 꾸륵꾸륵~ 소리를 내고선 그만 사라져 버리곤 해서 나는 결코 어머니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는 씨앗물이 되기는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어린 나는 슬퍼했었다.


나는 마른 펌프에 씨앗물만 적당히 넣고 펌프질을 해주면 힘찬 물길을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곤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내게 어머니는 펌프에 부어진 씨앗물이 또 다른 물길을 일으키기 위해 잠시도 쉬지 않는 펌프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당신이 직접 힘차게 펌프질을 하시면서 가르쳐주셨다.


지금 네가 물길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건 아직 어리기 때문이란다.

좀 더 키가 자라고, 팔뚝이 두꺼워지면 너도 힘찬 펌프질로 마침내 저 밑 깊은 곳으로부터 맑은 물줄기를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지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물길을 끌어올리려는 네 의지란다.




그랬다.
어느 순간 나도 물길을 불러올 수 있을 만큼 성장하였지만 무작정 펌프질을 한다고 해서 새 물길이 내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끌어올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땅 속의 물길을 끌어올리기 위해선 씨앗물을 부은 뒤 잠시도 쉬지 않고 펌프질을 해야만 한다.
잠시 한눈이라도 팔거나 펌프질을 게으르게 하다 보면 씨앗물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힘들게 펌프질에 들였던 어깨품까지도 일순간에 암흑 같은 좁다란 파이프관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려서 또다시 씨앗물을 붓고 펌프질을 해야 하는 수고를 겪어야 했던 기억이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다른 물길을 끌어올린 그 씨앗물은 첫 물이지만 결코 마실 물은 아니다.
저 파이프 깊이 들어가 잠자고 있는 물을 흔들어 깨워 세상 밖으로 솟구치게 하고는 그만 버려지는 물이다.
하지만 펌프질을 할 때 우리는 씨앗물 없이는 마른 펌프에서 결코 새로운 물길을 솟아나게 할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 또한 씨앗물과 같지 않나 하는 생각을 문득 해 본다.


어떤 것을,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누군가 내게 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내주어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씨앗물만을 믿고 게으른 펌프질로 끝내 물을 끌어올리지 못한 채 새로운 씨앗물을 부어야 하는 악순환만을 되풀이하지 하지 않기 위해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
처음에 그저 아무런 보상이 없는 내줌이고 노력이지만 어느 만큼 힘들여 노력하고 나면 비로소 땅 속의 물이 펌프의 윗부분까지 차 오르면서 그때부터는 펌프질에 힘을 조금만 가해도 물이 펑펑 솟아 올라오는 것처럼 세상 모든 위치가 바로 이 펌프질과 같지 않을까.

어머니가 우리에게 바랬던 것도....




어머니는 한사코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내게 어머니는 항상 훌륭한 씨앗물이었다.
당신이라는 씨앗물을 부수어 컴컴한 파이프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물길을 잡아끌어주신 것이다.
어머니라는 씨앗물이 있어 난 힘찬 어깨품으로 지금의 '나'라는 물길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폭포수처럼 콸콸 쏟아지는 물길은 아니지만 어쨌든 지금의 내 모습으로 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어머니는 당신의 뜰에서 녹이 슨 낡은 펌프를 치워버리셨다.

그리고 어느 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이제 어머니는 내게서 그리움이라는 성장통으로 매일매일 자라고 있다.

나는 그 성장통이 목젖이 저리도록 아프지만,

길을 걷다가도 예고 없이 눈물이라는 물길을 솟구치게 하지만,

그 그리움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매일매일 물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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