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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과겨울 Jul 12. 2020

쓰지 않는 마음은 녹슬고 망가진다.

익숙하지 않은 마음을 사용하는 연습.

인간은 무엇에서건 배운다. 그러니 문학을 통해서도 배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결정적으로 배우고, 자신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로부터 가장 처절하게 배운다. 그때 우리는 겨우 변한다. 인간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바뀌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뿐이다.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지겹고 긴 후회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나를 후회하게 하는 선택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한다. 그러나 비슷한 기로 앞에 서게 되면 여지없이 결심은 흐트러진다. 익숙한 습관은 실패와 오류와 과오로 겨우 얻은 깨달음을 순식간에 무력하게 만든다.

언젠가에 누군가를 만났고 큰 감흥 없이 희미하게 이어지던 관계는 순식간에 끝났다. 여기까지는 익숙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만남이 이상했던 것은 이해할 수 없이 긴 후회를 남겼다는 점이다. 짧은 시간 동안의 모든 걸 늘어놓고 살펴봐도 특별할 것이 없었던 만남이라 한참을 혼란 속에 끙끙 앓았다. 그리고 그런 후회 뒤에는 본 적 없는 커다란 외로움이 놓여있었다. 외로움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혼자라서 외로웠고 누군가는 함께인데 외로워서 외로워했다. 어차피 그런 거라면 타인에게 기대고 싶지도 기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람을 사람으로 지우는 방법은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과 함께 지나쳤어야 할 후회와 외로움은 뻥 뚫린 마음속에 고여 점점 더 불어났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감정의 흐름을 어떻게든 말이 되는 말로 설명하고 싶어 장황한 문장으로 정리해보기도 했다.

‘이 답답하고 이상한 감정은 여러모로 사랑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를 향한 일방적인 마음을 노래하는 가사와 너무 많이 닮아있었다.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고 사랑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지나친 감정이었다.’

어딘가에 갇혀있다가 한순간 제멋대로 튀어나와 엉망이 된 마음을 보고 나니 한 번쯤은 제대로 써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제까지처럼 미리 끝을 단정 짓거나 섣불리 멈추지 말고 어떻든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 보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일을 시도할 때와 마찬가지로 익숙하지 않은 마음을 사용하는 것에도 연습과 요령이 필요했다. 다치고 닳는 것이 두려워서 쓰지 않으면 마음도 녹슬고 망가진다. 누군가에게든 아낌없이 표현하고 후회하지 않으리란 다짐이 무색하게 마음은 자꾸만 어긋나고 삐걱거렸다. 단지 낯설고 어색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런 용기를 내고 싶을 만큼 좋은 상대를 찾는 것은 무척이나 드물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나도 좋은 사람이 아니었고 세상의 좋은 사람들도 한결같지는 않았다. 그걸 알면서도 기왕이면 ‘좋은 사람’을 찾아서 좋아하고 싶었다. 맹목적으로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뒤늦은 노력으로 따라잡기 어려운 완성된 재능 같은 마음이었다.

연애 관계를 지속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게 대단하고 견고한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관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미약한 마음을 부풀리는 마땅한 노력을 할 줄 알았다. 나도 애써 꺼내 살핀 마음을 방치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회의감과 피로가 잦은 간격으로 찾아들 때마다 스스로를 채근할 이유를 찾지 못해 주춤했다. 조심스레 나아가다가도 상대방의 어중간한 행동 한 번에 마음은 일그러졌고 애매하고 혼란스러운 태도로 갈팡질팡하며 내 감정에만 몰두하다 보면 상대방을 감정 없는 사람으로 대하기 일쑤였다. 관계의 결정권이 나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지난한 경험으로 깨달았으면도 비슷한 상황을 반복했다. 눈앞에 있으면 부질없는 노력을 떨치고 싶었고 멀어지면 해보지 않은 노력을 후회했다.

타인에 대한 환상이나 기대를 지워야 만남을 지속할 수 있다는 생각과 환상과 기대 없이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애초에 누군가를 좋아하고 표현하는 것도 타고나는 능력일지 모른다는 생각과 그건 변명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애정 관계 같은 것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과 제때에 써보지 못한 마음이 후회로 남을 것이라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시끄럽게 쏟아지는 마음의 소리 중 어떤 것이 후회와 가까이 맞닿아있는지 알지 못했다.


불필요한 상대에게 감정을 쏟고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낭비하지 않은 시간과 감정은 도대체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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