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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주 Mar 11. 2023

심드렁하다

몽상가들

눈에 힘을 풀고 창 밖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다 문득 영화 '몽상가들'에 나왔던 에바 그린의 표정이 떠올랐다. 특유의 나른한 표정으로 주인공 남자에게 담뱃불을 붙여달라 하는 그녀의 모습은 관객의 마음을 단 1초 만에 휘어잡아 버렸다.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심드렁한데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모습.

영화의 스토리를 따라가기보다 그녀의 모습을 한 픽셀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던 강렬한 등장이다.


그렇게 순간 사람을 홀리는 심드렁함은 보통의 것과 조금 다르다. 물론 아름다운 생김새도 중요하다. 거기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말든, 지금 내 주머니 사정이 어떻든, 어린 시절의 상처에서 여전히 피가 나든 말든, 네가 내게 사랑을 갈구하든 말든, 봄이 오든 여름이 오든 지구가 멸망하든 태양이 폭발하든 말든 전부, 상관없다는 식의 것이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 내 담배에 불이 꺼졌고, 라이터가 없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그녀가 그런 행동을 했던 영화 속 배경은  프랑스 68 혁명 당시 억눌려왔던 이들이 자유를 향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던 현장이었다. 단단히 묶여있던 고삐가 살짝 풀리자, 비로소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보게 되던 시기.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어디까지 될 수 있는 사람인지, 자유가 가져다 줄 환희가 얼마나 큰 지 이제 짐작이 되던 시기.

억압과 감시로부터 벗어나 현재의 욕망에 눈을 뜨기 시작한, 낭만의 시절.


창 밖을 바라보다 떠오른 상념의 끝은 결국 낭만에 대한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다짐한다. 나는 나의 행복, 나의 욕망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다짐이라도 하지 않으면 금세 타인의 행복, 타인의 욕망에 휩쓸려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휩쓸린 나는, 잘게 부서지고 깨져 작은 부스러기가 되어버린다. 부스러기가 되지 않기 위해 내 안의 단단한 알맹이를 지키기 위해

시시한 것에 휘둘리지 않는 심드렁함이 필요하다.



I don't care _ digital painting, 21x32, 2022 by 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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