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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묘미 Jan 24. 2023

그럼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뭐예요?

영화감상이 취미인 자의 변명

낯선 만남의 자리.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고자 서로 취미를 묻는다. 영화감상이 취미라고 말한다. 어떤 영화를 가장 좋아하냐는 질문이 흥겹게 꼬리를 문다. 잠깐 생각에 잠긴다. 딱 한 편을 꼽기가 어려워 여러 가지 영화 제목을 나열한다. 한 줄로 이어지던 대화의 실낱이 어수선하게 늘어진다. 대화가 방향을 잃고 더욱 어색한 상황에 빠진다. 이러한 사태를 방지하고자 질문에 대한 답을 미리 준비해본다. 최애 영화를 한 편 찾는다는 건 새로운 관계의 거리를 좁힐 해법을 찾는 과정이기도 했다.


책상 앞에 앉아서 좋아하는 영화 몇 편을 작성해본다. 다소 생소할법한 제목들이 보인다.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는 부담이 생긴다. 적어놨던 영화에 빗금을 긋고 새 페이지로 넘어간다. 이번에는 다르게 접근해본다. 방금 적었던 영화들은 어쩌면 내 인생에서 최고로 좋아하는 영화가 아닐지도 모른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16살 때쯤으로 가보자. 홍콩영화와 일본영화에 푹 빠졌던 때가 떠오른다. 특히 주성치 영화와 일본 코미디 영화를 좋아했다. 그때는 웃으며 볼 수 있었던 영화들은 스무 살 후반에 들어서며 더 이상 꺼내보지 않았다. 인생은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는 현실을 깨닫고 난 뒤 코미디가 서글프게 다가왔다.


감상 매체를 바꿔본다. 초등학생 때 오래 살던 아파트 단지에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다. 가끔 아버지의 요구로 이연걸이나 성룡이 출연한 비디오를 빌렸고, 동생과 함께 보려고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빌렸다. 한 번 보고 반납하기에 돈이 아까워서 다음 날 오전에 꼭 한 번을 돌려보고 반납했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해가 떠 있는 오후 내내 혼자 있거나 동생과 함께 있었다. 출출하면 식탁에 놓인 토스트나 콘푸레이크를 먹었다. 옆에는 꼭 전단지가 놓여있었는데 그 뒷면에는 간식을 챙겨 먹으라는 어머니의 글이 적혀 있었다.


긴 겨울 방학이 시작됐다. 눈이 하얗게 쌓인 거리는 한산했다. 동네 친구와 놀다가 해 질 녘이면 빈집으로 돌아와 때 이른 고독을 느꼈다. 그때마다 허전한 마음을 달래주었던 것은 1990년 영화 <나 홀로 집에>였다. 2시간가량의 이 영화는 크리스마스 때마다 TV에서 방영됐다. 공식적인 휴일인 크리스마스에 출근하지 않은 부모님과 함께 영화를 보는 시간은 그야말로 따뜻했다. 외출하지 않고 가족끼리 방안에 모여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을 <나 홀로 집에>가 알려주었다. 다시 평일이 돌아오고 텅 빈 오후가 되면 비디오테이프에 녹화한 <나 홀로 집에>를 틀어놓고 부모님의 퇴근을 기다렸다. 해가 지면 가족이 다 함께 둘러앉아 노릇하게 구운 고등어를 발라 먹었다.


극장 개봉한 영화가 그 당시 히트를 쳤더라고 1, 2년이 지나면 새로운 영화에 밀려나거나 5년, 10년이 지나면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나 홀로 집에>는 영화역사를 넘어 생애주기를 잇는 명작이다. 명작이란 순환하는 시간 속에서도 자신의 제목이 자수된 의자에 앉아 기억 한편에 자리한 작품이다. 사회에서 생활하며 잊혔더라도 마음속에 간직해온 딱 한 편의 영화는 살아가고 죽어가는 회의와 허무에 작지 않은 원동력이 된다. 그렇게 명작이라고 불리는 영화는 한 사람의 인생을 공유하며 강렬한 교훈과 주제 없이도 사람을 성장시킨다. 어떠한 환경에도 방해 없는 고유한 속성. 삶에 물처럼 스며드는 아늑한 무엇. 이것은 영화가 영화로서 존재할 수 있는 필수불가결의 요소이다. 


어색한 대화 속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나 홀로 집에>라고 말해본다. 생각지도 못한 답을 듣게 된 상대는 장난치냐는 반응이거나, 영화감상이라는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으로서 공감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나 홀로 집에>는 어디 하나 빠질 데 없는 명작이며, 남녀노소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는지 부연설명을 달아도 확실하게 방향을 잃는다. 때 이른 고독에 휩싸였던 초등학생에게 안락함을 주었던 영화. <나 홀로 집에>의 용감한 주인공 케빈을 보던 모든 아이들은 이미 케빈이었다. 홀로 빈 집을 지켜냈던 케빈. 한없이 장난꾸러기였던 케빈. 이웃을 돕고 예쁘게 웃던 케빈. 가족에게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였던 케빈. 이제 TV에서 방영하는 <나 홀로 집에>를 보기 어려워졌지만, 어른이 되어버린 나의 기억과 추억 속에는 영화가 녹화된 비디오테이프가 여전히 재생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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