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스보이 슬립스> 90년대 캐나다로 이민 간 엄마와 아들의 이야기
빛. 영화는 빛으로 탄생하고 죽는다. 빛을 빚으면 소리, 문자, 무형의 상상까지도 이미지로 구현된다.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동시대 영화와 달리 굵은 입자로 인해 화질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영화는 16mm 필름으로 촬영됐다. 이미지를 디지털로 담아내는 현재에 필름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건 여러모로 쉬운 일이 아니다. 빛을 담는 방식에서 필름을 선택했다는 것만으로도 이야기 화법으로 영화를 선택한 결정이 온전히 설명된다.
인간. 영화는 캐나다로 이주한 한국인 어머니(소영)과 아들(동현)의 삶을 담는다. 영화라는 틀로 인간을 가두지 않고 시대 안에서 재현되는 인간의 삶을 유영하듯 필름에 새긴다. 카메라는 굽이치는 시간의 유연한 줄기 위에 우뚝 선 곤충처럼, 방해물을 휘돌아 가는 물길에 몸을 맡긴 물고기처럼 움직인다. 조약돌은 물의 세기에 이리저리 몸을 굴리며 닳는다. 이민자가 처한 거친 운명은 무뎌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감췄다고 믿어야 할 뿌리를 찾아야만 하는 숙명. 누군가에게는 소소한 숙제일지 모르나, 시대의 진폭 양극단에서 부유하는 이민자에게는 삶을 지탱할 무한의 여정이다.
소리. 어머니 소영은 아들 동현과 한국어와 영어 두 가지 언어로 대화한다. 새로운 사회에 발 붙여야 할 아들의 이름은 두 개가 된다. 어느 쪽 하나 확실히 선택할 수 없는 동현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한다. 학교로 불려 간 소영은 의기소침한 아들에게 고개를 들라며 당당함을 가르친다. 천적의 위협으로 가득한 자연 속에서 새끼를 지켜내려는 어미 모습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아이의 울음 속에서 태어난다. 어머니는 이미지보다 위대하며, 하나의 인간, 한 명의 여성을 뛰어넘는다. 모든 것을 품어주고 흘러가게 한다. 자연마저도 모성의 힘에 존경을 표한다.
산. 산의 고요함은 언어가 침투하지 못할 숭고한 휴식을 준다. 소영이 캐나다에서 찾은 산은 속죄의 산이다. 그러나 모국의 산은 소영의 한을 정으로 품어준다. 동현에게는 자연과 어우러진 우리나라 고유의 정서 또한 겪어야 할 낯선 성장통이다. 그러나 새로움은 아이의 흥미를 이끈다. 아이의 순수함은 어디서든 풍요로움을 흡수하고 언제든 즐길 준비가 돼 있다.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과거를 기억하지 않고 빛으로 겪게 한다. 영화의 아름다움은 인간과 자연 그사이에 진실한 빛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데 있다. 화려하지 않아도 체험으로서의 영화가 완성되는 순간은 오직 그때뿐이다.